~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시리즈 총집 완결본~
자작나무 숲에 첫 가을비가 내렸다. 빗줄기는 가을비 치고 꽤나 세찼다. 마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씻어내려는 듯이. 그리고 여기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였던 자가 모든 것을 내버리고 복수의 길로 몸을 던지려 한다.
백림사 본당에서 정신을 차린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눈 앞에는 목숨과 모든 내공을 쏟아부어 자신을 치료해 준 팔부기재의 마지막 모습이 스쳐갔다. 석화하며 그 생명을 영원히 태워버리던 여덟 고수의 모습이. 듣기로 그들은 진서연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매우 깊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둠과 복수의 길을 벗어나 홍문의 길로 돌아가란 말을 남기고 희생해버렸다. 그들의 진의를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진서연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나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가?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가? 그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였다.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복수, 복수를 위한 결심의 기반이 허약한 것이 분명했다. 이래서는 복수의 길을 걷는 도중에 이도저도 아니게 될 것이 자명했기에, 그는 백림사 본당에서 선택을 한 후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그래, 모두 묵화의 상처를 씻고 더 수련하여 복수하라는 뜻임에 틀림이 없다.
백림사 본당 안에 들어온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삼사년 전 쯤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짐 한 켠을 차지해오고 있었던 홍문파 도복을 꺼냈다. 살짝 낡아버린 옷 등판에 새겨진 문파의 문양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사부님과 사형, 사저들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 후 배신자 무성의 얼굴이, 진서연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들로 인해 비참하게 죽어간 사형과 사저들의 싸늘하게 식은 모습이 기억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꼭 살아남으라고 외치며 한 줌 재가 되고 만 사부님의 마지막 모습이 눈 앞에 새겨진 것만 같았다. 막내야, 꼭 살아남거라. 그 말은 마음 속에 낙인처럼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게 홍문파 식구들의 유언은 복수심을 기르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아서, 진서연 일당과 무성을 막내의 손으로 처치해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도복을 쓸어내리던 손을 저도 모르게 움켜쥐었다. 말끔하게 접혀 있던 도복이 구겨져 주름이 잡혔다.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현담대사 앞에 섰다. 마음을 정했는가? 현담대사가 물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이미 홍문파가 멸문당했을 때부터 자신의 결심은 단 한 순간도 변치 않았다고 대답했다.
현담대사는 자신 앞에 선 대협을 보았다. 그 눈빛만 보아도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묻기로 했다. 어떤 선택을 했느냐고. 대협은 망설임없이 입을 열었다. 마도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보게, 하며 현담대사는 그 눈빛이 꺼지도록, 단 한 번이라도 더 말리고 싶었다. 자신이 했던 과거의 선택이 어떤 일을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이 대협이 자신의 결정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한다면 오죽 좋으련만.
말리실 생각이라면 그만두라는 대협의 무딘 어투에 결국 현담대사는 이 대협의 선택을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선 제단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에도 한숨은 노승의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제단 앞으로 걸어가 검붉은 불꽃이 넘실거리는 화로에 홍문파 도복을 태웠다. 그렇게나 추억이 깃든 도복을 불태우는데도,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타오르는 도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직접 그 눈을 마주하지 않아도 현담대사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복수에 눈 먼 자의 안광임을.
초점 없는 눈으로 잿가루가 된 도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백림사를 떠났다. 유란의 안내에 따라 무신의 탑 어딘가에 존재하는 마도의 방으로 찾아간 그는 천진권에게 진정한 마도의 길을 걷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천진권은 자신에게 복수의 길을 걷겠다고 맹약하고, 복수만을 생각하라 말하였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거리낌없이 천진권에게 맹약했다. 그는 천진권이 자신에게 있는 홍문신공을 모조리 폐할줄 알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따로 뜻이 있거나 굳이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수준이라 그랬을 거라 짚고 넘기기로 했다. 옆에서 유란이 마도의 길을 걷는 자에게 어울릴 거라며 준 의복을 내려다보았다. 기괴하지만 익숙한 모양으로 보아 흑룡을 추종하는 자들이 입는 옷인 듯 하였다. 하지만 그는 흑룡을 따른다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옷을 받아들었지만 입지는 않았다.
이제 어둠을 수련하고, 마공을 다스려 복수하는 일만 남았다. 한 마디 말로써는 간단하지만, 실행하기에는 무겁고 어려운 일이었다. 유란은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 같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를 위해 내공을 탈취하거나, 어둠을 퍼뜨리거나, 생명을 빼앗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귀띔까지 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첫걸음을 떼기 위해, 용맥을 타고 대사막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온 대사막은 여전히 황량하고도 불쾌했다. 메마른 모랫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이 땅을 지날 때 있었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사부님이 모욕당하고 자신은 살인자로 몰렸던 일, 멍청하고 탐욕스러운 관리들에게 이용만 당했던 일, 배신자 무성을 만났던 일, 온갖 더러운 인간군상을 만났던 일…….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 일들을 겪었던 순간만큼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래서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사람이 어떻게 오염될 수 있는 지를 이곳에서 알았기 때문이었다.
유가촌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무성이 왜 그리 됐는지도 알 법했다. 무성을 이해하고 용서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왜 그런 인간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있었다. 권력 앞에서는 약자가 되고, 그 권력을 등에 업고선 약자에게 강자가 되는, 그런 사람들이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을 대악으로 만드는 것은 수많은 소악이 상처를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소악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것은 그의 마음일 뿐, 그의 이성은 동료였던 자들을 죽일 수 있을 때까지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사람을 죽여가며 마공을 수련하려는 목적이었다. 허나 무성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한 마음은 그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마기를 내보이기 시작한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표정엔 거침이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칠 뻔하다 자신을 알아본 주민을 죽인 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사부님을 욕보이고, 더러운 모습을 보였던 마을 주민들의 모습만이 끝없이 나타났다. 그들은 일그러진 얼굴로 사부님과 문파를 욕보였으며, 저주를 퍼부었다. 그들이 저주를 퍼붓는 그 주둥이와 일그러진 얼굴만이 둥둥 마을에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문득 살아남고 이득을 취하기 위해 남의 목숨을 밟고 선 이곳 주민들은 죽이는 것 마저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이름 모를 무인이 도착한 유가촌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마을에서 있었던 일과 다르게 언제나 평화로워 보였던 마을이었지만, 이제 생지옥이 펼쳐졌다. 마공을 사용하는 무인은 마을 사람들을 하나하나 마물로 만들어 나갔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도망치고 비명을 지르다 붙잡혀 마물이 되거나 생명력을 모두 빨려 죽음의 문턱에 있었고, 나머지는 이미 정신도 형체도 잃은 하급 마물이 된지 오래였다. 하늘은 어둡게 변했으며 마을에는 인적이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마물이 되기 직전의 마지막 발악, 그들을 마물로 만든 마물들의 소리만이 유가촌을 울렸다. 마지막으로 무인은 한손에 끌어모았던 마기를 마을에서 폭발시켰다. 그리고 돌아서선 입구에서 죽였던 시신을 하나하나 꾹꾹 짓밟으며 마을을 나섰다. 등진 마을에선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나며 하늘을 가렸고, 무인의 얼굴을 스친 모래바람에 멀그스레한 비린내가 풍겨왔고, 그와 함께 슬픈 가락의 콧노래도 들려왔다. 그는 이것이 환청이라 여기며 용맥으로 빠르게 이동하였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지난날 대사막에서 보았던 마영강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도 이 유가촌 주민과 다르지 않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대나무 마을에서의 일로 인의에 흠집이 났다면, 그는 균열을 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부패한 장군은 진서연에 의해 흔적도 없이 죽고 말았기에 복수를 할 수 없었다. 곤란했다. 손에 피를 더 진하게 묻혀야 마공을 잘 다룰 수 있을 터. 그 주인이 없으니, 군대라도 없애버리는 게 좋겠다 여겼다.
그가 그런 결심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막 전역에는 어느 살인귀가 마영강군 패잔병들을 전부 도륙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무능한 열사지대의 운대륙군은 그 살인귀가 고수란 소식에 벌벌 떨었고, 그를 틈탄 별 볼 일 없는 범죄자들이 활개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살인귀라 불리우는 존재가 지나가기만 하면 범죄자들도 그저 말 없는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살인귀는 그저 대사막을 방황했다. 그에게는 대사막의 건조한 모래폭풍도, 뜨거운 열기도, 덤벼드는 존재들도 전혀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복수가 너무나 하고 싶었고, 아직 그것이 현실이 되지 않았기에 어떤 식으로든 아직 이루지 못한 복수의 칼을 쓸데없는 곳에 휘두르고 다닐 뿐이었다.
그렇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가 대사막을 방황한 지 꽤 시간이 지나서였다. 마물이 되어버린 옛 사형이자 배신자를 만나고야 말았다. 지나가던 마물이 어쩐지 눈에 익어 발걸음을 잠시 멈추니, 진서연에 의해 그리 변했던 배신한 사형의 마지막 모습과 같았다. 홍문파의 막내는 그 마물이 정말 배신자이자 옛 사형이란 것을 확인하고 조소했다. 그렇게 복수에 집착하며 배신을 해댄 결과가 결국 이런 식이었다니. 의식도 없이 그저 의미 없는 울부짖음만 반복하는, 저주받은 삶을 얻은 게 배신의 끝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영원히 찢어 죽여도 모자랐지만, 이미 마물이 되어 버렸으니 영원히 마물로 고통받게 두는 것이 고작 최선이었다.
배신한 사형을 지나친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어느덧 다시 타루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넓은 농지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풍경, 그리고 처음 복수를 다짐했을 때에 보았던 풍경.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검은 연기와 함께 어떤 형체가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가니 위험한 듯, 부드러운 유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자신에게 전언이 있기에 유란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란은 그를 보더니 풋 웃고는 이런 곳에서 저런 것들이나 죽여서 그릇을 채우기 전에 늙어 죽을 것이라고 빈정댔다. 그러면서 차라리 이런 잡것들만 있는 대사막보다는 수행자들이나 문파들이 더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유란을 따라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피어오른 탁기의 기운은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던 흔적마저 지워내고 있었다.
그 이후,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마공을 모은다는 이유로 적당한 규모의 문파나 수행자들을 심렬하는 시간을 보냈다. 무신으로부터 특별히 전언도 없었고, 하루라도 내공을 취하거나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복수를 저도 모르게 잊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불안감이 몰아친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한없이 그릇 채우기에 열중한 상태였다. 강탈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공을 가진 무림인에게 모두 내공을 빼앗았고, 반항이 격렬한 자는 죽이기도 했다. 아무리 내공을 빼앗아도 부족한 것만 같았다. 술을 아무리 들이켜도 그 찰나의 순간만 목을 적실 수 있고, 이내 다시 목이 타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폐부와 심장을 감싸 누르는 듯한 답답함. 그런 그의 시선을 돌린 것은 유란이 보낸 서신이었다. 서신 봉투를 보고 잠시 숨을 돌렸을 때에는 이미 계절이 여러 차례 바뀐 후였다.
봉투를 열어 서신을 꺼내 보니 내용은 없고 알 수 없는 문양만이 덩그러니 그러져 있었다. 서신이 스스로 공중으로 뜨더니 문양에서 빛이 나며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걸어나온 것은 당연하게도 유란이었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나 보네? 진서연에 대해서 잘 묻지도 않고. 아,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라며 유란은 태평스레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에게 말을 붙였다. 그는 언뜻 보면 고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분노에 불을 지핀 듯 하였다. 재미없게 정색하긴. 유란은 코웃음쳤다. 무슨 용건이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조용히 입을 열고 말했다. 진서연이 손 댄, 네 사형이란 자. 아직 기억해? 유란의 대답에 다소 멍해보이기까지 했던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표정이 순간 변모했다.
많이 신경쓰이는 눈치로군. 마물이 되었다고 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다른 녀석이 주워가서 개조를 시도한 모양이야. 그리고 그 와중에 촉마왕의 그릇으로 선택을 받았나 보더라구? 그 마음에 안 드는 까마귀가 고른 게 하필 네 사형이라니, 뭘 노리는 지 알만한걸. 유란은 재미있다는 듯, 약간 과장스런 말투로 상황을 설명하며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들을 잡아냈다. 이 정도 돌이면 수면에 충분한 파동을 일으키리라 예상했고, 그것은 맞아 떨어졌다. 뭐, 마황의 그릇인 너보단 영원히 아래겠지만 말이야.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표정을 본 유란은 그렇게 덧붙이려다 입술을 닫고는 미소지었다. 잡스런 마물이 되어 영혼도 자아도 잃고 떠돌 줄로만 알았는데, 촉마왕의 그릇이라.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의미 모를 표정을 지었다. 흔들리는 촛불은 그의 옆얼굴에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왕급 마족의 선택을 받을 정도면 그릇이 작진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1000년 전 현계 정벌을 이끌던 촉마왕이라면. 게다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홍문파에서 수련하던 무성의 모습을 봐왔다.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한 일이었다. 촉마왕의 힘으로 그릇을 어둠으로 채운 자를 부수고 내공을 빼앗으면 복수 중 한 가지는 끝나는 것이었다. 게다가 내공을 빼앗으면 최종적으로 진서연을 죽이기 위한 준비도 어느 정도 끝나니 일석이조였다. 무성을 찢어죽이는 상상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촛불 너머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마음을 정한 거야? 파천성도까진 내가 용맥을 열어주지. 아직 무영단 호법회 녀석들이 남아있으니, 최대한 경계하라구. 무신님의 기운 때문에 저들이 선명하게 느끼진 못하겠지만, 네 무공은 그들이 적대하는 마공이니 말이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유란은 말을 끝마치고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용맥을 열기 시작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유란의 손짓에 따라 용맥 안으로 사라졌다.
침체된 분위기의 이 나류국의 공중요새는 간혹 들려오는 까마귀 울음소리를 제외하면 너무나도 고요했다. 용맥이 열린 장소는 파천성도의 중심에 있는, 제단이자 광장을 겸했던 듯한 시설 바로 옆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흑룡교도들이 무언가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흑룡교도들을 경계하는 태세였으나 흑룡교도들은 그를 공격하지 않고 의식을 계속 진행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어찌 되었든 편하게 됐다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고대 건축물들이 부서져 내리다 만 듯한 것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어서,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중 높은 것을 찾아 경공으로 허공을 딛고 사뿐히 올라섰다. 이 공중요새는 딱히 험준한 구석 없이 대부분 평탄한 지형이었기에 전경을 보는 데 있어 어려운 점은 없었다. 그의 시선이 파천성 반대편 끝에 있는 제단에 닿았을 때는 전투가 벌어지는 듯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하늘이 어둡게 변하고 까마귀 깃털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제단에 가까운 기둥을 찾아 뛰어올랐다. 제단 쪽 기둥에 올라 상황을 보니, 이곳의 무영단과 무성과 그 수하들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자리에서 기척을 숨긴 채, 전운이 가실 때까지 기다렸다. 전운이 사라지자, 그는 제단으로 접근하여 휘말린 무인인 척 했다. 무영단 호법회는 제단에서 뒷수습을 하던 중, 휘말린 무인을 발견한 것인지 그에게 다가왔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천연덕스럽게 수습으르 돕겠다 나서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넌지시 물었다. 마족에게 점령당한 파천성도에서 제단을 사수하던 그들은 최근 까마귀와 함께 나타난 가면의 악인이 파천성 심장부에 기거하며 마족을 부린다는 내용을 설명했다. 아마도 그건 무성이겠지.
잠시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으나, 이내 고개를 들자 그 흔적은 말끔히 사라졌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고맙다 이야기하며 다른 용맥을 짚을만한 장소가 있는지 무영단에게 물었다. 그들은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제단 근처에서 용맥을 열라고 만류했다. 무성이 격리술을 사용하는 동료인 현운령을 납치했던 적이 있는데, 그가 구출된 것은 무성이 이미 격리술을 얻은 후였다. 고로 제단보다 성채에 가까운 곳으로 용맥을 열러 갔다가는 격리술을 사용하는 무성이 언제 동료로 취급하고 공격해올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약간의 정보를 취득한 그는 나름의 비책이 있으나 사정 상 말할 수 없다고, 대륙으로 돌아갈 용맥을 여는 것일 뿐이니 괜찮을 것이라 양해를 구했다. 호법회는 이 무인의 앞길이 걱정되었으나, 재정비와 수습에도 바빴기에 무인의 말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선량한 무인인 척 감사인사를 하며 조심해야겠다 웃어 넘기고는 요새 끄트머리로 향했다.
무영단 호법회 광운령은 그 의문의 무인이 이곳에 있을 때, 무신의 기운이 아주 약하게나마 느껴졌다는 것을 인지했다. 하지만 오래 전 죽은 무신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자신이 착각을 했을 것이라 여겼다.
진서연이 무성에게 마공을 사용한 이후, 무성은 변이의 고통과 탁기가 주는 자체적인 고통 사이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몸부림치며 벽과 바닥을 수시로 긁어댔으므로 손톱은 빠진 지 오래였고, 손가락 끝도 헐어가고 있었다. 이빨도 고통을 참아내다 보면 부서지거나 갈렸다. 피부는 핏기도 잃고 메마른 상태로 뼈에 겨우 붙어 있는 상태였다. 한 마디로 사람의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던 무성 앞에 백발의 여자가 나타났다. 그 여자는 무성을 진서연이 남긴 쓰레기라고 부르며 재활용할 것이니 데려가라고 했다. 무성은 자신이 쓰레기가 아니라고 반박하려고 했지만, 말할 힘 조차도 남아있지 않아서 쉰 숨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자신을 데려가는 검은 옷을 입고 모자 안면 부분에 기이한 노란 거울을 단 자들은 그 여자를 '주리아'라고 불렀다. 무슨 말을 꺼내기만 하면 장난스런 투로 말했지만, 말을 꺼낼때마다 보이는 숨 넘어갈 듯한 광소는 진서연의 침묵과는 다른 의미로 공포스러웠다. 이 자는 애초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처럼 잔혹했다.
주리아와 흑룡교도들이 자신을 데려다 둔 곳은 극마의 방이라 불리는 듯 했다. 변이와 탁기의 고통이 몰아치다가도, 그들의 주술을 받으면 변이되려던 육체도 고통도 잠재워졌다. 무성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사라진 고통 덕에 이들이 자신을 구원해주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주술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전보다 더한 고통이 닥쳐왔다. 문득 무성은 이들은 자신을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이용하려 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곳을 벗어날 힘도 재간도 없었다. 그저 차라리 죽여달라며 발버둥치고 절규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흑룡교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성의 사지를 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극마의 주술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즈음에, 무성은 어둠 속에서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는 흑룡교도들이 문을 열고 자신을 끌어내러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런 무성을 비웃듯이, 문이 열리는 소리는 그 간절한 염원이 끝나자마자 들려왔다. 무성은 본능적으로 공포가 엄습해옴을 느꼈다. 벽에 붙어서 제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망가져버린 손이었던 부분으로 벽을 붙잡았다. 비명을 지르며 제발 죽여달라고, 언제나처럼 절규했으나 이제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매번 소리를 질러댔으니 당연했다.
걸레짝같은 몸으로 힘없이 극마의 방으로 다시 끌려가며 무성은 생각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왜 나는 항상 비참하고 무력해야만 하는 것인가. 처음에는 자신의 무력함을 탓했지만, 고통 속에서 자책은 억울함을 거쳐 더 깊은 원한과 증오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들의 화살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겨냥하고 있었다. 평생 당해오기만 했는데, 왜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은 나여야만 하는가. 악행을 제일 먼저 저지른 건 마영강인데……. 모든 것이 불공평하다. 사람이 싫다. 증오스럽다. 힘, 힘만 있었다면……. 마영강도, 진서연도, 주리아도 없애버렸을 텐데. 이렇게 당하지만은 않았을텐데.
힘을 원하느냐. 고통과 증오가 무성을 완전히 집어삼켰을 때, 그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누, 누구냐! 근원지를 알 수 없는 음성에 무성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다시 한 번 묻겠다. 힘을 원하느냐?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여전히 목소리의 주인은 알 수 없었지만, 무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준다는 말에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 그래. 힘만 얻을 수 있다면 내 영혼까지도 바치겠다. 무성의 답을 듣자 목소리는 잠시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다. 그렇다면 내가 힘을 주지. 그 증오심을 잊지 말거라.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자 무성은 자신의 몸을 감싸는 기운을 감지했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어쩐지 이번에는 진정으로 원하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의문의 기운이 무성을 감싸자, 무성의 몸은 그 기운을 흡수하며 변이하기 시작했다. 힘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지만 이 역시도 고통을 수반하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극마의 주술로 받았던 고통의 강도를 모두 합산한 듯한 고통이었다. 신체기관을 하나하나 전부 찢어발기고 태워버리는 듯한, 그런 아픔이었다. 그 고통 속에서, 무성은 희미해진 기억들을 더듬었다. 누나와 명한 형이 혼례를 준비하던 일, 부모님의 생신 선물을 준비하던 일, 사부님의 병을 걱정해서 잠을 못 이루던 일, 삼 년동안 잡일만 하던 막내의 모습을 지켜보던 일…….
무성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점점 격해지는 고통 끝에서 모든 것이 희미해졌지만, 회한만큼은 선명했다. 내가? 내가 한 일인가? 아니야. 하지만 맞지. 왜 이렇게 되고 만 거지? 그건……. 난 단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고자 힘을 원했을 뿐인데…….
최후의 회한은 고통의 끝과 함께 어딘가로 스러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무성은 넘쳐나는 힘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들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 거라 생각했다. 한동안 그는 너무나도 기뻤기 때문에, 정신 나간 모양새로 웃어대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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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무영단 호법회에게 돌아갈 용맥을 연다 둘러대고선, 이전의 이름을 잃고 파천성 또는 검은 마천루라 불리는 성채 앞에 도달했다. 한때는 이렇지 않았겠지만, 현재는 음산한 기운만이 감도는 곳이 되어 있었다. 마천루 꼭대기로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일렁이는 붉은 용혈문과 마천루로 흘러들어가는 기운의 움직임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이 붉은 용혈문은 저 기운 탓인 듯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기운이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붉은 용혈문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으나, 붉은 용혈문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번씩이고 부딪혀 보았으나, 용혈문의 기운은 그를 밀쳐냈다. 이것은 그의 분노를 더욱 쌓아올렸으나, 용혈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입장이기에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마천루 근처의 절벽에서 붉은 용혈문의 기운이 바뀔 때까지 잠도 안 자고 충혈된 눈으로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나흘 정도를 보낸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지쳐서 이후 며칠 가량을 죽은 듯 잠든 채 있었다. 깨어난 그는 잠든 것을 매우 후회했으나, 용혈문의 기운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움직이며 더욱 붉어지는 모습을 보고 다시 용혈문으로 향했다. 붉은 용혈문에 손을 대자 손이 용혈문 안으로 쑥 들어갔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 보이고는 붉은 용혈문 안으로, 파천성 안으로 갔다.
이 성의 수호자들은 마치 자아가 존재는 하되, 그 자아가 근본까지 뭉개져 버린 듯한 기괴한 자들이었다. 한때는 믿음직하며 칭송받는 고대 나류의 수호자들이었으나, 현재는 그저 이성을 잃고 어둠에 완전히 먹혀버린 상태였다. 그저 분노하며 마족이 아닌 자들을 죽이고, 어둠에 잠식시키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한때는 이들도 어둠의 반대편에 서서 현계의 어둠을 몰아내는 데 일조한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둠은 그들을 집어삼키고는 잔인하게도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을 타락시키는 존재로 만들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마족이 되어 마지막 영혼까지 어둠에 잠식당한 수호자들을 모두 처치했다. 사부님 같은 분이었다면, 이런 녀석들도 정화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이들을 정화했더라도 과연 그들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것,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적의 편이 되어 파괴했다는 사실을 정신이 들고 나서 알았다면……. 어쩌면 이렇게 처치하는 일이 더 나았을 거라고,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갑자기 복잡해진 심경 속에서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성의 심장부에 도달했을 때엔, 배신한 사형이 온전한 촉마왕의 그릇으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악연의 수레바퀴 위에서, 무성 사형은 인간의 형상을 잃고 촉마왕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콧노래 소리는 감정의 깊고 얕음을 신경쓰지 않고 들쑤셔댔다. 심장이 없다면 이런 허전함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이 구슬픈 콧노래를, 유가촌의 학살이 끝나고 마을을 나서면서 들은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기시감을 뒤로 하고 악연의 수레바퀴로 내려앉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허공에서 날갯짓하는 촉마왕을 보았다. 까마귀 깃털이 익계의 기운이 응집하는 아래에서 흩날렸다. 내가 이 살육의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아느냐? 촉마왕이 날갯짓과 동시에 공격해오며 말했다. 네 녀석의 기분 따위를 내가 알 필요는 없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가 공격을 흘리며 답했다.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내 부하로 삼아주지. 촉마왕이 코웃음치며 날아올랐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이 말에서 의문의 모순점을 느꼈으나 그것이 정확히 어째서 모순적인 것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촉마왕이 이미 자신을 죽일 생각으로 그리 말해서인지, 아니면 이면의 다른 의중인 건지 불분명했다. 만약 두번째 경우라면, 혹시……. 그 뒤의 생각이 생명을 얻기 전에, 누군가 속삭였다. 멍청하긴. 전부 죽여버리라고. 잡생각을 하다니, 복수할 생각이 없단 말이냐?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속삭임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머리가 식었다.
촉마왕이 날아오른 자리에 나타난 마계의 부하들을 죽이자 주변의 풍경이 기묘한 색으로 덧입혀졌다. 그는 이것이 촉마왕이 마공으로 변모시킨 격리술임을 직감했다. 촉마왕을 상대하는 와중에 주변에서 몇 가지 기운이 맴돌다 흩어져 무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마 이것은 조각난 무성의 원혼들일 것이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귀찮은 녀석들이라 여기며 약간의 내력을 소모해 원혼들을 찢어버렸다. 그 원혼들은 사라지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대체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사부님!
원혼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이명을 만들어냈고, 이내 재가 되듯 산산히 부서져 사라졌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모습에 신경을 잠시 돌린 순간 격리술이 풀림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격리술이 풀리며 몸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격리술을 아예 받지 않는 법은 없었기에, 격리된 상태에서 원혼들을 처치하고 다시 탈출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매번 격리 상태에서 원혼들의 같은 말을 들으니 짜증이 났다. 좀 닥쳐, 닥치란 말이야! 무성의 원혼이 나타날 때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혼들을 모두 찢어발겼다. 역겨운 놈. 나와 사부님과 사형, 사저들께 한 짓이 있는데 혼자 억울한 척 하기는.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절로 이를 갈며 말했다. 무성의 삶이 불행의 연속이었음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다시 인지하고 싶진 않았다. 어찌 되었건 그는 자신을 포함한 홍문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자였기 때문이다.
격리술이 풀리고 난 이후로 전투를 오래 끌게 되면 위험하다, 라는 직감이 들었다. 체력이 문제라기보다, 다른 부분에서 소모가 되어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격리를 당하면 이렇게 힘이 많이 빠져나가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선 무영단에게 격리술에 관한 정보를 더 듣고 오면 좋았을 거라며 후회 아닌 후회를 했다. 아무리 마공을 사용하고 있다 한들, 적이 마기가 가득한 공격을 해오는데 몸이 오래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촉마왕이 사용하는 무공들은 죽이기가 아니라 고통을 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듯 하였기에 더욱 그랬다.
수없이 무공을 사용하며 합을 겨루는 동안에도, 기력은 끝없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 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뿐, 둘 다 같은 상황이었다. 정확히는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 쪽의 기력소모가 더 빨랐지만. 어리석군, 아직도 투항할 생각이 없느냐? 촉마왕이 조롱하며 물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경공으로 뛰어올라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 너는 내가 죽일 것인데 투항할 이유가 없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이 촉마왕의 한 쪽 팔을 반쯤 찢었다. 촉마왕은 날갯짓으로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며 옛 사제를 쳐냈다. 그는 경공술로 추락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뼈가 몇 대가량 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 틈을 타서 촉마왕은 다시 격리술을 시전했다. 이번엔 격리됨과 동시에 눈과 코에서 피가 흐르고, 피를 토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격리되는 횟수가 이보다 더 늘어나게 되면 승산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악이 받쳐 올랐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고, 전부 찢어 죽여야만 한다고 내면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같은 모습으로 피어오르는 무성의 원혼을 보았다. 원혼들은 촉마왕에게 힘을 퍼부으면서도 다시 서글프게 울부짖었다. 대체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사부님!
원혼을 몇 번쯤 찢어내던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도 대사막에서 들었던 유성의 과거 이야기와 원혼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네 과거는 네 과거일 뿐. 네 녀석의 배신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내게 동정을 강요하기라도 하는 것이냐?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렇게 외치며 남은 원혼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원혼이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되었을 때, 격리술을 풀어내자 무릎에 힘이 풀렸다.
촉마왕도 더 이상 마계의 힘을 끌어모은 주술을 이 공간에 퍼부어대진 못했다. 마기를 그렇게 공급받으며 마계의 주술을 써댔음에도, 옛 사제는 탈출해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촉마왕은 정말 사부님이 막내 녀석을 홍문신공의 계승자로 인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걸까, 내가 부족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어둠에 물들었기에 그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저 녀석을 죽여서 대사막에서 받았던 설움을 갚고 나 무성이 더 뛰어났음을, 그렇기에 사부의 선택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임을 홍 사부에게 증명하리라. 어둠에 물든 마음은 한 점의 빈틈도 남기지 않고 마음을 검은 색으로 끝없이 덧칠했다.
격리술이 풀린 후, 얼굴에 손을 가져가 대자 피가 흥건하게 묻어 나왔다. 정신력으로 버티며 촉마왕과 비정한 공격을 주고받았다. 서로 큰 차이 없이 상처만 점점 늘어날 뿐이었다. 서로가 입힌 내상으로 인해 회복력도 점점 떨어져갔다. 공격이 되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머리에, 정확히는 외상 쪽이 아니라 깊은 머리 속 어딘가에서 두통이 퍼졌다. 그와 동시에 잠시 풍경이 여러 겹으로 겹쳐 보였다. 덤벼드는 촉마왕의 공격을 반격해내자 다시금 거리가 벌어졌다. 다시금 짙은 두통이 머리를 두드렸다. 잠시 세상이 멈춘 듯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 침묵을 가르는 작은 목소리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에게 닿았다. 하지만 그는 귓가에 닿은 목소리가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그 목소리가 멍하니 소실될 때까지 인지할 수 없었다.
잠시 동안의 기이한 현상이 사라지고 이내 전투 중인 현실로 되돌아온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두통이 사라졌음을 알아챘다. 뇌내에 어떤 장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샌가부터 귓가에 맴돌던 슬픈 콧노래는 이제서야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시금 부딪혀오는 공격들을 방어하며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전투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기운 소모가 심해짐이 와닿았기 때문에, 촉마왕과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이번 합에 끝을 보려는 태세를 취했다. 지친 기색이 조금 더 역력해진 그들이 최후의 일 합을 겨루려 할 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허공에서 촉마왕을 향해 손을 뻗으며 내려오는 여자의 환영을 보았다. 하지만 그 환영은 이내 흐릿해졌다.
그 환영을 본 순간, 지금까지 보았던 장면들과 슬프게 귓가를 따라다녔던 콧노래까지 합쳐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무성과 자신에게 들리지 않는 절규를 해왔던 그리고 손에 모은 마공의 기운을 거두었다. 촉마왕은 덕분에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과거에 함께했던 사제의 몸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꿰뚫린 몸에서 피가 솟구쳤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한 말쯤 될 법한 피를 토하고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장기가 일부 뜯겨나갔기에 아우성을 치는 듯한 통증이 스며들어왔다. 고통을 표출할 힘조차 모두 소모한 전투였던지라 그는 소리없이 고통에 먹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촉마왕은 끝을 내러 내려오지 않았다. 촉마왕과 현재 그의 그릇인 무성의 성격상 자신의 마지막을 꼭 끝내고 싶어할 것인데,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시선을 돌려 허공을 보니 촉마왕이 자신을 꿰뚫었던 손을 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문득 천진권이 자신의 홍문신공을 폐하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사부님 혹은 천진권, 두 사람 중 하나가 자신의 기혈에 최소한의 보험을 들어 두었다는 의미가 된다.
아마 큰 상처를 입고 신공을 모두 빼앗길 위기가 닥쳤을 때, 그럴 수 없도록 반격하는 술법일 것이다. 어둠의 길에 들게 되면 상대를 죽이며 본능적으로 내공을 취하려 하기 마련이다. 촉마왕도 당연히 그 수순을 밟았으리라. 천하사절 정도 되는 자들이 '무언가' 수를 써 뒀다면, 장시간의 전투로 체력과 부상이 생긴 촉마왕으로써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촉마왕은 몸부림을 쳐 봤지만, 이내 몸이 굳어 추락했다. 기괴하게 꺾인 몸을 한 채로 추락하고 있는 촉마왕은 타버린 것처럼 스러지더니, 다시 그릇인 무성의 모습으로 돌아온 채 쓰러졌다. 그리고 무성은 과거 자신의 사제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공격을 거두었는지를.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흐릿한 형체가 풍경에 겹쳐져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무성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가 가리킨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무성이 촉마왕과 거래한 것은 분명히 그 자신의 영혼일 터. 힘을 받아 쓰고도 패배했으니 그 대가는 혼을 영원히 어둠에 사로잡히는 것이리라. 그가 고개를 들어 흐릿한 형체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을 때, 그 영혼은 어둠의 손으로 떨어졌다. 만신창이가 된 무성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허탈했다. 복수의 일격을 거뒀건만, 결국 남은 것은 비참하고도 허망한 풍경이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복수를 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어둠이 속삭였다. 그의 몸에서 현계의 것이 아닌 기운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혼만 아직 몸에 머무르지 않을 뿐, 숨은 붙어 있다. 죽이자. 죽여버리자. 마지막 기회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독촉했다. 어둠은 정신을 좀먹으며 마공을 부상이 덜한 왼손에 집중시켜 무성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복수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감각조차도 아득해져가는,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이 칼을 잡고는 왼손을 찍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손바닥 정중앙에 박힌 칼을 뽑아내자 왼손은 오른손보다 더 붉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강한 통증이 한 겹 더 쌓이는 것 같았다. 다시 몸을 일으키자 공중에서 일렁이던 형체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것은 사람의 형체였고, 그 얼굴은 무성의 집에서 보았던 유정의 초상화와 완전히 일치했다. 그 모습을 보자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복수에 물든 마음이 허무하게도 재처럼 타버리는 것을 느꼈다.
유성이의 어둠이 너무 깊어 접근할 수 없었기에 계속 유성이를 따라다니다 대협을 보고 희망을 가졌지만, 대협도 저를 보실 수 없으신 듯 하여 무작정 이곳까지 따라왔습니다……. 유정의 영혼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곁을 지나 정신을 잃고 쓰러진 무성의 옆에 섰다. 유정은 그저 무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뒷모습에 어떤 말을 걸어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
계속 흐릿한 형체가 이곳을 맴도는 것이 신경쓰였습니다. 그리고 제 머릿속에 흘러 들어온 것들로 인해 그 형체가 당신인 것을 알았습니다. 사형을 이렇게 만들어버리고야 만 저를 탓하시려는 것입니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유정의 영혼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향해 돌아선 유정의 영혼은 그 어떤 증오의 감정도 담지 않은, 온화하지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뇨,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한걸요.대협과 유성이가 이렇게까지 멀리 돌아가야만 했던 것도 결국 이 아이의 업보일 테니까요. 유정은 천천히 앉고서는 안타까운 듯 쓰러진 무성의 손을 잡았다. 대협을 제가 이렇게 늦게 만나게 된 것은, 대협께서도 어둠의 길에 발을 들이셨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 대협께서 유성이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리라 믿게 되었습니다. 어둠을 걷어내고 저를 볼 수 있게 된 것과, 유성이를 죽이지 않고 복수 대신 용서를 택하신 것은 대협의 근원이 선함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대협이 그 위에 덧칠한 어둠을 완전히 걷어내는 날이 오면 이 아이는 구원을 받고, 대협의 그 은혜가 온누리에 빛을 가져올 것입니다……. 유정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무성 사형과 당신에게 있었던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형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어째서 저를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유정에게 물었다. 유성이가 정작 복수를 하려는 이유인 제가, 그걸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대협도 결국 유성이를 죽이지 않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유정이 고개를 들자 서글픈 표정이 드러났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유정의 얼굴에 환영이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꼭 살아남으라 하시면서도, 복수만은 극구 말리시던,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사부님의 환영이. 그는 사부님의 환영을 본 순간 무릎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어쩌면 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 원한 것은 이게 맞겠지요. 지금에 와서야 사부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수의 길은 공허했습니다. 복수가 성공하기 직전이었는데도 희열감이 차오르지 않았어요. 타오르는 증오심은 모든 것을 태우고 나면 그 자신마저도 태워버리고 맙니다. 결국 남는건 꺼져가는 증오의 불씨와 잿더미가 된 마음 뿐이겠지요. 이건 무성 사형이 운명과 어둠에 의해 만들어진 악인인 것을 제가 알게 되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참회의 제를 지내야겠습니다. 모두를 위해서요. 지금까지 제가 저질러온 악행은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이미 존재하는 죄악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천명제가 다가오기 전, 모든 것을 정리하고자 제를 지내둘 것입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기구한 운명에 휩싸인 이 남매를 한참 바라보다 얼굴에서 서글픔을 지워냈다. 그 자리에 남겨진 표정은 유정이 지었던 것과 같은 온화함이 느껴졌으나, 눈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불명확했다.
저는 사형을 데리고 무일봉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제게 남겨진 모든 일을 끝내야 사형을 되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에, 지금은 무일봉을 지킬 수 없습니다. 무성 사형께서 나쁜 꿈을 꾸지 않도록 사형의 곁을 지켜주십시오. 한참의 침묵 끝에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가 입을 열었다. 유정의 영혼은 알았다 대답한 후 거듭 가볍게 목례하며 사라졌다.
무성 사형, 돌아가요. 무일봉으로.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지친 눈꺼풀을 닫으며 읊조렸다. 그 무게는 하늘보다 무거운 시간이 담긴 무게일 터였다. 목소리는 이미 메말라 일말의 생기조차 돌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했던 어느 말보다도 인의가 느껴졌음을 그 자신은 몰랐으리라. 당연하게도 무성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가 조금 전 낮게 읊조린 말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무성에게 말을 걸었다.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 있었지만 마음은 가벼워졌고, 육신이 살아있음에 있어서 어떤 갑갑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남은 힘을 이용하여 최대한 제룡림과 가까운 곳에 작은 용맥을 열었다. 그 용맥 사이로 부축한 두 사람의 형체가 사라졌다.
천명제에서 모든 은원을 끝내고 돌아올게요. 사형, 사저, 그리고 사부님. 원한의 고리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도록 제가 마지막이 되어 끊어내겠습니다. 운이 좋게도 마지막 기운을 써서 연 용맥이 남방대륙의 어느 해안가였기 때문에, 그는 작고 낡은 나룻배에 무성을 태우고 올라 무일봉을 향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가을비가 톡톡 떨어지다 후둑거리며 풍경을 적셨다. 그렇기에 그의 눈가에 맺힌 것이 수 년간의 회한임을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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