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시리즈 총집 완결본~



 자작나무 숲에 첫 가을비가 내렸다. 빗줄기는 가을비 치고 꽤나 세찼다. 마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씻어내려는 듯이. 그리고 여기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였던 자가 모든 것을 내버리고 복수의 길로 몸을 던지려 한다.

 백림사 본당에서 정신을 차린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눈 앞에는 목숨과 모든 내공을 쏟아부어 자신을 치료해 준 팔부기재의 마지막 모습이 스쳐갔다. 석화하며 그 생명을 영원히 태워버리던 여덟 고수의 모습이. 듣기로 그들은 진서연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매우 깊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둠과 복수의 길을 벗어나 홍문의 길로 돌아가란 말을 남기고 희생해버렸다. 그들의 진의를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진서연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나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가?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가? 그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였다.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복수, 복수를 위한 결심의 기반이 허약한 것이 분명했다. 이래서는 복수의 길을 걷는 도중에 이도저도 아니게 될 것이 자명했기에, 그는 백림사 본당에서 선택을 한 후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그래, 모두 묵화의 상처를 씻고 더 수련하여 복수하라는 뜻임에 틀림이 없다.

  백림사 본당 안에 들어온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삼사년 전 쯤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짐 한 켠을 차지해오고 있었던 홍문파 도복을 꺼냈다. 살짝 낡아버린 옷 등판에 새겨진 문파의 문양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사부님과 사형, 사저들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 후 배신자 무성의 얼굴이, 진서연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들로 인해 비참하게 죽어간 사형과 사저들의 싸늘하게 식은 모습이 기억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꼭 살아남으라고 외치며 한 줌 재가 되고 만 사부님의 마지막 모습이 눈 앞에 새겨진 것만 같았다. 막내야, 꼭 살아남거라. 그 말은 마음 속에 낙인처럼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게 홍문파 식구들의 유언은 복수심을 기르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아서, 진서연 일당과 무성을 막내의 손으로 처치해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도복을 쓸어내리던 손을 저도 모르게 움켜쥐었다. 말끔하게 접혀 있던 도복이 구겨져 주름이 잡혔다.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현담대사 앞에 섰다. 마음을 정했는가? 현담대사가 물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이미 홍문파가 멸문당했을 때부터 자신의 결심은 단 한 순간도 변치 않았다고 대답했다.

  현담대사는 자신 앞에 선 대협을 보았다. 그 눈빛만 보아도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묻기로 했다. 어떤 선택을 했느냐고. 대협은 망설임없이 입을 열었다. 마도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보게, 하며 현담대사는 그 눈빛이 꺼지도록, 단 한 번이라도 더 말리고 싶었다. 자신이 했던 과거의 선택이 어떤 일을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이 대협이 자신의 결정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한다면 오죽 좋으련만.

  말리실 생각이라면 그만두라는 대협의 무딘 어투에 결국 현담대사는 이 대협의 선택을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선 제단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에도 한숨은 노승의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제단 앞으로 걸어가 검붉은 불꽃이 넘실거리는 화로에 홍문파 도복을 태웠다. 그렇게나 추억이 깃든 도복을 불태우는데도,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타오르는 도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직접 그 눈을 마주하지 않아도 현담대사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복수에 눈 먼 자의 안광임을.

  초점 없는 눈으로 잿가루가 된 도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백림사를 떠났다. 유란의 안내에 따라 무신의 탑 어딘가에 존재하는 마도의 방으로 찾아간 그는 천진권에게 진정한 마도의 길을 걷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천진권은 자신에게 복수의 길을 걷겠다고 맹약하고, 복수만을 생각하라 말하였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거리낌없이 천진권에게 맹약했다. 그는 천진권이 자신에게 있는 홍문신공을 모조리 폐할줄 알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따로 뜻이 있거나 굳이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수준이라 그랬을 거라 짚고 넘기기로 했다. 옆에서 유란이 마도의 길을 걷는 자에게 어울릴 거라며 준 의복을 내려다보았다. 기괴하지만 익숙한 모양으로 보아 흑룡을 추종하는 자들이 입는 옷인 듯 하였다. 하지만 그는 흑룡을 따른다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옷을 받아들었지만 입지는 않았다.

 이제 어둠을 수련하고, 마공을 다스려 복수하는 일만 남았다. 한 마디 말로써는 간단하지만, 실행하기에는 무겁고 어려운 일이었다. 유란은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 같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를 위해 내공을 탈취하거나, 어둠을 퍼뜨리거나, 생명을 빼앗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귀띔까지 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첫걸음을 떼기 위해, 용맥을 타고 대사막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온 대사막은 여전히 황량하고도 불쾌했다. 메마른 모랫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이 땅을 지날 때 있었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사부님이 모욕당하고 자신은 살인자로 몰렸던 일, 멍청하고 탐욕스러운 관리들에게 이용만 당했던 일, 배신자 무성을 만났던 일, 온갖 더러운 인간군상을 만났던 일…….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 일들을 겪었던 순간만큼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래서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사람이 어떻게 오염될 수 있는 지를 이곳에서 알았기 때문이었다.

  유가촌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무성이 왜 그리 됐는지도 알 법했다. 무성을 이해하고 용서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왜 그런 인간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있었다. 권력 앞에서는 약자가 되고, 그 권력을 등에 업고선 약자에게 강자가 되는, 그런 사람들이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을 대악으로 만드는 것은 수많은 소악이 상처를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소악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것은 그의 마음일 뿐, 그의 이성은 동료였던 자들을 죽일 수 있을 때까지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사람을 죽여가며 마공을 수련하려는 목적이었다. 허나 무성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한 마음은 그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마기를 내보이기 시작한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표정엔 거침이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칠 뻔하다 자신을 알아본 주민을 죽인 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사부님을 욕보이고, 더러운 모습을 보였던 마을 주민들의 모습만이 끝없이 나타났다. 그들은 일그러진 얼굴로 사부님과 문파를 욕보였으며, 저주를 퍼부었다. 그들이 저주를 퍼붓는 그 주둥이와 일그러진 얼굴만이 둥둥 마을에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문득 살아남고 이득을 취하기 위해 남의 목숨을 밟고 선 이곳 주민들은 죽이는 것 마저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이름 모를 무인이 도착한 유가촌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마을에서 있었던 일과 다르게 언제나 평화로워 보였던 마을이었지만, 이제 생지옥이 펼쳐졌다. 마공을 사용하는 무인은 마을 사람들을 하나하나 마물로 만들어 나갔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도망치고 비명을 지르다 붙잡혀 마물이 되거나 생명력을 모두 빨려 죽음의 문턱에 있었고, 나머지는 이미 정신도 형체도 잃은 하급 마물이 된지 오래였다. 하늘은 어둡게 변했으며 마을에는 인적이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마물이 되기 직전의 마지막 발악, 그들을 마물로 만든 마물들의 소리만이 유가촌을 울렸다. 마지막으로 무인은 한손에 끌어모았던 마기를 마을에서 폭발시켰다. 그리고 돌아서선 입구에서 죽였던 시신을 하나하나 꾹꾹 짓밟으며 마을을 나섰다. 등진 마을에선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나며 하늘을 가렸고, 무인의 얼굴을 스친 모래바람에 멀그스레한 비린내가 풍겨왔고, 그와 함께 슬픈 가락의 콧노래도 들려왔다. 그는 이것이 환청이라 여기며 용맥으로 빠르게 이동하였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지난날 대사막에서 보았던 마영강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도 이 유가촌 주민과 다르지 않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대나무 마을에서의 일로 인의에 흠집이 났다면, 그는 균열을 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부패한 장군은 진서연에 의해 흔적도 없이 죽고 말았기에 복수를 할 수 없었다. 곤란했다. 손에 피를 더 진하게 묻혀야 마공을 잘 다룰 수 있을 터. 그 주인이 없으니, 군대라도 없애버리는 게 좋겠다 여겼다.
 
  그가 그런 결심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막 전역에는 어느 살인귀가 마영강군 패잔병들을 전부 도륙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무능한 열사지대의 운대륙군은 그 살인귀가 고수란 소식에 벌벌 떨었고, 그를 틈탄 별 볼 일 없는 범죄자들이 활개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살인귀라 불리우는 존재가 지나가기만 하면 범죄자들도 그저 말 없는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살인귀는 그저 대사막을 방황했다. 그에게는 대사막의 건조한 모래폭풍도, 뜨거운 열기도, 덤벼드는 존재들도 전혀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복수가 너무나 하고 싶었고, 아직 그것이 현실이 되지 않았기에 어떤 식으로든 아직 이루지 못한 복수의 칼을 쓸데없는 곳에 휘두르고 다닐 뿐이었다.
 

  그렇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가 대사막을 방황한 지 꽤 시간이 지나서였다. 마물이 되어버린 옛 사형이자 배신자를 만나고야 말았다. 지나가던 마물이 어쩐지 눈에 익어 발걸음을 잠시 멈추니, 진서연에 의해 그리 변했던 배신한 사형의 마지막 모습과 같았다. 홍문파의 막내는 그 마물이 정말 배신자이자 옛 사형이란 것을 확인하고 조소했다. 그렇게 복수에 집착하며 배신을 해댄 결과가 결국 이런 식이었다니. 의식도 없이 그저 의미 없는 울부짖음만 반복하는, 저주받은 삶을 얻은 게 배신의 끝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영원히 찢어 죽여도 모자랐지만, 이미 마물이 되어 버렸으니 영원히 마물로 고통받게 두는 것이 고작 최선이었다.
 
  배신한 사형을 지나친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어느덧 다시 타루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넓은 농지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풍경, 그리고 처음 복수를 다짐했을 때에 보았던 풍경.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검은 연기와 함께 어떤 형체가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가니 위험한 듯, 부드러운 유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자신에게 전언이 있기에 유란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란은 그를 보더니 풋 웃고는 이런 곳에서 저런 것들이나 죽여서 그릇을 채우기 전에 늙어 죽을 것이라고 빈정댔다. 그러면서 차라리 이런 잡것들만 있는 대사막보다는 수행자들이나 문파들이 더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유란을 따라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피어오른 탁기의 기운은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던 흔적마저 지워내고 있었다.

 그 이후,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마공을 모은다는 이유로 적당한 규모의 문파나 수행자들을 심렬하는 시간을 보냈다. 무신으로부터 특별히 전언도 없었고, 하루라도 내공을 취하거나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복수를 저도 모르게 잊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불안감이 몰아친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한없이 그릇 채우기에 열중한 상태였다. 강탈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공을 가진 무림인에게 모두 내공을 빼앗았고, 반항이 격렬한 자는 죽이기도 했다. 아무리 내공을 빼앗아도 부족한 것만 같았다. 술을 아무리 들이켜도 그 찰나의 순간만 목을 적실 수 있고, 이내 다시 목이 타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폐부와 심장을 감싸 누르는 듯한 답답함. 그런 그의 시선을 돌린 것은 유란이 보낸 서신이었다. 서신 봉투를 보고 잠시 숨을 돌렸을 때에는 이미 계절이 여러 차례 바뀐 후였다.

 봉투를 열어 서신을 꺼내 보니 내용은 없고 알 수 없는 문양만이 덩그러니 그러져 있었다. 서신이 스스로 공중으로 뜨더니 문양에서 빛이 나며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걸어나온 것은 당연하게도 유란이었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나 보네? 진서연에 대해서 잘 묻지도 않고. 아,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라며 유란은 태평스레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에게 말을 붙였다. 그는 언뜻 보면 고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분노에 불을 지핀 듯 하였다. 재미없게 정색하긴. 유란은 코웃음쳤다. 무슨 용건이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조용히 입을 열고 말했다. 진서연이 손 댄, 네 사형이란 자. 아직 기억해? 유란의 대답에 다소 멍해보이기까지 했던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표정이 순간 변모했다.

 많이 신경쓰이는 눈치로군. 마물이 되었다고 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다른 녀석이 주워가서 개조를 시도한 모양이야. 그리고 그 와중에 촉마왕의 그릇으로 선택을 받았나 보더라구? 그 마음에 안 드는 까마귀가 고른 게 하필 네 사형이라니, 뭘 노리는 지 알만한걸. 유란은 재미있다는 듯, 약간 과장스런 말투로 상황을 설명하며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들을 잡아냈다. 이 정도 돌이면 수면에 충분한 파동을 일으키리라 예상했고, 그것은 맞아 떨어졌다. 뭐, 마황의 그릇인 너보단 영원히 아래겠지만 말이야.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표정을 본 유란은 그렇게 덧붙이려다 입술을 닫고는 미소지었다. 잡스런 마물이 되어 영혼도 자아도 잃고 떠돌 줄로만 알았는데, 촉마왕의 그릇이라.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의미 모를 표정을 지었다. 흔들리는 촛불은 그의 옆얼굴에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왕급 마족의 선택을 받을 정도면 그릇이 작진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1000년 전 현계 정벌을 이끌던 촉마왕이라면. 게다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홍문파에서 수련하던 무성의 모습을 봐왔다.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한 일이었다. 촉마왕의 힘으로 그릇을 어둠으로 채운 자를 부수고 내공을 빼앗으면 복수 중 한 가지는 끝나는 것이었다. 게다가 내공을 빼앗으면 최종적으로 진서연을 죽이기 위한 준비도 어느 정도 끝나니 일석이조였다. 무성을 찢어죽이는 상상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촛불 너머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마음을 정한 거야? 파천성도까진 내가 용맥을 열어주지. 아직 무영단 호법회 녀석들이 남아있으니, 최대한 경계하라구. 무신님의 기운 때문에 저들이 선명하게 느끼진 못하겠지만, 네 무공은 그들이 적대하는 마공이니 말이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유란은 말을 끝마치고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용맥을 열기 시작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유란의 손짓에 따라 용맥 안으로 사라졌다.

 침체된 분위기의 이 나류국의 공중요새는 간혹 들려오는 까마귀 울음소리를 제외하면 너무나도 고요했다. 용맥이 열린 장소는 파천성도의 중심에 있는, 제단이자 광장을 겸했던 듯한 시설 바로 옆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흑룡교도들이 무언가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흑룡교도들을 경계하는 태세였으나 흑룡교도들은 그를 공격하지 않고 의식을 계속 진행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어찌 되었든 편하게 됐다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고대 건축물들이 부서져 내리다 만 듯한 것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어서,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중 높은 것을 찾아 경공으로 허공을 딛고 사뿐히 올라섰다. 이 공중요새는 딱히 험준한 구석 없이 대부분 평탄한 지형이었기에 전경을 보는 데 있어 어려운 점은 없었다. 그의 시선이 파천성 반대편 끝에 있는 제단에 닿았을 때는 전투가 벌어지는 듯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하늘이 어둡게 변하고 까마귀 깃털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제단에 가까운 기둥을 찾아 뛰어올랐다. 제단 쪽 기둥에 올라 상황을 보니, 이곳의 무영단과 무성과 그 수하들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자리에서 기척을 숨긴 채, 전운이 가실 때까지 기다렸다. 전운이 사라지자, 그는 제단으로 접근하여 휘말린 무인인 척 했다. 무영단 호법회는 제단에서 뒷수습을 하던 중, 휘말린 무인을 발견한 것인지 그에게 다가왔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천연덕스럽게 수습으르 돕겠다 나서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넌지시 물었다. 마족에게 점령당한 파천성도에서 제단을 사수하던 그들은 최근 까마귀와 함께 나타난 가면의 악인이 파천성 심장부에 기거하며 마족을 부린다는 내용을 설명했다. 아마도 그건 무성이겠지.

 잠시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으나, 이내 고개를 들자 그 흔적은 말끔히 사라졌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고맙다 이야기하며  다른 용맥을 짚을만한 장소가 있는지 무영단에게 물었다. 그들은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제단 근처에서 용맥을 열라고 만류했다. 무성이 격리술을 사용하는 동료인 현운령을 납치했던 적이 있는데, 그가 구출된 것은 무성이 이미 격리술을 얻은 후였다. 고로 제단보다 성채에 가까운 곳으로 용맥을 열러 갔다가는 격리술을 사용하는 무성이 언제 동료로 취급하고 공격해올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약간의 정보를 취득한 그는 나름의 비책이 있으나 사정 상 말할 수 없다고, 대륙으로 돌아갈 용맥을 여는 것일 뿐이니 괜찮을 것이라 양해를 구했다. 호법회는 이 무인의 앞길이 걱정되었으나, 재정비와 수습에도 바빴기에 무인의 말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선량한 무인인 척 감사인사를 하며 조심해야겠다 웃어 넘기고는 요새 끄트머리로 향했다.

 무영단 호법회 광운령은 그 의문의 무인이 이곳에 있을 때, 무신의 기운이 아주 약하게나마 느껴졌다는 것을 인지했다. 하지만 오래 전 죽은 무신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자신이 착각을 했을 것이라 여겼다.

 진서연이 무성에게 마공을 사용한 이후, 무성은 변이의 고통과 탁기가 주는 자체적인 고통 사이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몸부림치며 벽과 바닥을 수시로 긁어댔으므로 손톱은 빠진 지 오래였고, 손가락 끝도 헐어가고 있었다. 이빨도 고통을 참아내다 보면 부서지거나 갈렸다. 피부는 핏기도 잃고 메마른 상태로 뼈에 겨우 붙어 있는 상태였다. 한 마디로 사람의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던 무성 앞에 백발의 여자가 나타났다. 그 여자는 무성을 진서연이 남긴 쓰레기라고 부르며 재활용할 것이니 데려가라고 했다. 무성은 자신이 쓰레기가 아니라고 반박하려고 했지만, 말할 힘 조차도 남아있지 않아서 쉰 숨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자신을 데려가는 검은 옷을 입고 모자 안면 부분에 기이한 노란 거울을 단 자들은 그 여자를 '주리아'라고 불렀다. 무슨 말을 꺼내기만 하면 장난스런 투로 말했지만, 말을 꺼낼때마다 보이는 숨 넘어갈 듯한 광소는 진서연의 침묵과는 다른 의미로 공포스러웠다. 이 자는 애초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처럼 잔혹했다.

 주리아와 흑룡교도들이 자신을 데려다 둔 곳은 극마의 방이라 불리는 듯 했다. 변이와 탁기의 고통이 몰아치다가도, 그들의 주술을 받으면 변이되려던 육체도 고통도 잠재워졌다. 무성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사라진 고통 덕에 이들이 자신을 구원해주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주술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전보다 더한 고통이 닥쳐왔다. 문득 무성은 이들은 자신을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이용하려 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곳을 벗어날 힘도 재간도 없었다. 그저 차라리 죽여달라며 발버둥치고 절규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흑룡교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성의 사지를 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극마의 주술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즈음에, 무성은 어둠 속에서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는 흑룡교도들이 문을 열고 자신을 끌어내러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런 무성을 비웃듯이, 문이 열리는 소리는 그 간절한 염원이 끝나자마자 들려왔다. 무성은 본능적으로 공포가 엄습해옴을 느꼈다. 벽에 붙어서 제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망가져버린 손이었던 부분으로 벽을 붙잡았다. 비명을 지르며 제발 죽여달라고, 언제나처럼 절규했으나 이제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매번 소리를 질러댔으니 당연했다.

 걸레짝같은 몸으로 힘없이 극마의 방으로 다시 끌려가며 무성은 생각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왜 나는 항상 비참하고 무력해야만 하는 것인가. 처음에는 자신의 무력함을 탓했지만, 고통 속에서 자책은 억울함을 거쳐 더 깊은 원한과 증오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들의 화살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겨냥하고 있었다. 평생 당해오기만 했는데, 왜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은 나여야만 하는가. 악행을 제일 먼저 저지른 건 마영강인데……. 모든 것이 불공평하다. 사람이 싫다. 증오스럽다. 힘, 힘만 있었다면……. 마영강도, 진서연도, 주리아도 없애버렸을 텐데. 이렇게 당하지만은 않았을텐데.

 힘을 원하느냐. 고통과 증오가 무성을 완전히 집어삼켰을 때, 그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누, 누구냐! 근원지를 알 수 없는 음성에 무성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다시 한 번 묻겠다. 힘을 원하느냐?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여전히 목소리의 주인은 알 수 없었지만, 무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준다는 말에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 그래. 힘만 얻을 수 있다면 내 영혼까지도 바치겠다. 무성의 답을 듣자 목소리는 잠시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다. 그렇다면 내가 힘을 주지. 그 증오심을 잊지 말거라.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자 무성은 자신의 몸을 감싸는 기운을 감지했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어쩐지 이번에는 진정으로 원하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의문의 기운이 무성을 감싸자, 무성의 몸은 그 기운을 흡수하며 변이하기 시작했다. 힘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지만 이 역시도 고통을 수반하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극마의 주술로 받았던 고통의 강도를 모두 합산한 듯한 고통이었다. 신체기관을 하나하나 전부 찢어발기고 태워버리는 듯한, 그런 아픔이었다. 그 고통 속에서, 무성은 희미해진 기억들을 더듬었다. 누나와 명한 형이 혼례를 준비하던 일, 부모님의 생신 선물을 준비하던 일, 사부님의 병을 걱정해서 잠을 못 이루던 일, 삼 년동안 잡일만 하던 막내의 모습을 지켜보던 일…….

 무성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점점 격해지는 고통 끝에서 모든 것이 희미해졌지만, 회한만큼은 선명했다. 내가? 내가 한 일인가? 아니야. 하지만 맞지. 왜 이렇게 되고 만 거지? 그건……. 난 단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고자 힘을 원했을 뿐인데…….

 최후의 회한은 고통의 끝과 함께 어딘가로 스러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무성은 넘쳐나는 힘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들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 거라 생각했다. 한동안 그는 너무나도 기뻤기 때문에, 정신 나간 모양새로 웃어대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한편,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무영단 호법회에게 돌아갈 용맥을 연다 둘러대고선, 이전의 이름을 잃고 파천성 또는 검은 마천루라 불리는 성채 앞에 도달했다. 한때는 이렇지 않았겠지만, 현재는 음산한 기운만이 감도는 곳이 되어 있었다. 마천루 꼭대기로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일렁이는 붉은 용혈문과 마천루로 흘러들어가는 기운의 움직임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이 붉은 용혈문은 저 기운 탓인 듯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기운이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붉은 용혈문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으나, 붉은 용혈문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번씩이고 부딪혀 보았으나, 용혈문의 기운은 그를 밀쳐냈다. 이것은 그의 분노를 더욱 쌓아올렸으나, 용혈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입장이기에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마천루 근처의 절벽에서 붉은 용혈문의 기운이 바뀔 때까지 잠도 안 자고 충혈된 눈으로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나흘 정도를 보낸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지쳐서 이후 며칠 가량을 죽은 듯 잠든 채 있었다. 깨어난 그는 잠든 것을 매우 후회했으나, 용혈문의 기운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움직이며 더욱 붉어지는 모습을 보고 다시 용혈문으로 향했다. 붉은 용혈문에 손을 대자 손이 용혈문 안으로 쑥 들어갔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 보이고는 붉은 용혈문 안으로, 파천성 안으로 갔다.

 이 성의 수호자들은 마치 자아가 존재는 하되, 그 자아가 근본까지 뭉개져 버린 듯한 기괴한 자들이었다. 한때는 믿음직하며 칭송받는 고대 나류의 수호자들이었으나, 현재는 그저 이성을 잃고 어둠에 완전히 먹혀버린 상태였다. 그저 분노하며 마족이 아닌 자들을 죽이고, 어둠에 잠식시키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한때는 이들도 어둠의 반대편에 서서 현계의 어둠을 몰아내는 데 일조한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둠은 그들을 집어삼키고는 잔인하게도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을 타락시키는 존재로 만들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마족이 되어 마지막 영혼까지 어둠에 잠식당한 수호자들을 모두 처치했다. 사부님 같은 분이었다면, 이런 녀석들도 정화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이들을 정화했더라도 과연 그들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것,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적의 편이 되어 파괴했다는 사실을 정신이 들고 나서 알았다면……. 어쩌면 이렇게 처치하는 일이 더 나았을 거라고,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갑자기 복잡해진 심경 속에서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성의 심장부에 도달했을 때엔, 배신한 사형이 온전한 촉마왕의 그릇으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악연의 수레바퀴 위에서, 무성 사형은 인간의 형상을 잃고 촉마왕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콧노래 소리는 감정의 깊고 얕음을 신경쓰지 않고 들쑤셔댔다. 심장이 없다면 이런 허전함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이 구슬픈 콧노래를, 유가촌의 학살이 끝나고 마을을 나서면서 들은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기시감을 뒤로 하고 악연의 수레바퀴로 내려앉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허공에서 날갯짓하는 촉마왕을 보았다. 까마귀 깃털이 익계의 기운이 응집하는 아래에서 흩날렸다. 내가 이 살육의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아느냐? 촉마왕이 날갯짓과 동시에 공격해오며 말했다. 네 녀석의 기분 따위를 내가 알 필요는 없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가 공격을 흘리며 답했다.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내 부하로 삼아주지. 촉마왕이 코웃음치며 날아올랐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이 말에서 의문의 모순점을 느꼈으나 그것이 정확히 어째서 모순적인 것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촉마왕이 이미 자신을 죽일 생각으로 그리 말해서인지, 아니면 이면의 다른 의중인 건지 불분명했다. 만약 두번째 경우라면, 혹시……. 그 뒤의 생각이 생명을 얻기 전에, 누군가 속삭였다. 멍청하긴. 전부 죽여버리라고. 잡생각을 하다니, 복수할 생각이 없단 말이냐?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속삭임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머리가 식었다.
 
 촉마왕이 날아오른 자리에 나타난 마계의 부하들을 죽이자 주변의 풍경이 기묘한 색으로 덧입혀졌다. 그는 이것이 촉마왕이 마공으로 변모시킨 격리술임을 직감했다. 촉마왕을 상대하는 와중에 주변에서 몇 가지 기운이 맴돌다 흩어져 무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마 이것은 조각난 무성의 원혼들일 것이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귀찮은 녀석들이라 여기며 약간의 내력을 소모해 원혼들을 찢어버렸다. 그 원혼들은 사라지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대체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사부님!

 원혼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이명을 만들어냈고, 이내 재가 되듯 산산히 부서져 사라졌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모습에 신경을 잠시 돌린 순간 격리술이 풀림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격리술이 풀리며 몸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격리술을 아예 받지 않는 법은 없었기에, 격리된 상태에서 원혼들을 처치하고 다시 탈출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매번 격리 상태에서 원혼들의 같은 말을 들으니 짜증이 났다. 좀 닥쳐, 닥치란 말이야! 무성의 원혼이 나타날 때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혼들을 모두 찢어발겼다. 역겨운 놈. 나와 사부님과 사형, 사저들께 한 짓이 있는데 혼자 억울한 척 하기는.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절로 이를 갈며 말했다. 무성의 삶이 불행의 연속이었음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다시 인지하고 싶진 않았다. 어찌 되었건 그는 자신을 포함한 홍문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자였기 때문이다. 

 격리술이 풀리고 난 이후로 전투를 오래 끌게 되면 위험하다, 라는 직감이 들었다. 체력이 문제라기보다, 다른 부분에서 소모가 되어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격리를 당하면 이렇게 힘이 많이 빠져나가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선 무영단에게 격리술에 관한 정보를 더 듣고 오면 좋았을 거라며 후회 아닌 후회를 했다. 아무리 마공을 사용하고 있다 한들, 적이 마기가 가득한 공격을 해오는데 몸이 오래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촉마왕이 사용하는 무공들은 죽이기가 아니라 고통을 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듯 하였기에 더욱 그랬다.

 수없이 무공을 사용하며 합을 겨루는 동안에도, 기력은 끝없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 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뿐, 둘 다 같은 상황이었다. 정확히는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 쪽의 기력소모가 더 빨랐지만. 어리석군, 아직도 투항할 생각이 없느냐? 촉마왕이 조롱하며 물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경공으로 뛰어올라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 너는 내가 죽일 것인데 투항할 이유가 없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이 촉마왕의 한 쪽 팔을 반쯤 찢었다. 촉마왕은 날갯짓으로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며 옛 사제를 쳐냈다. 그는 경공술로 추락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뼈가 몇 대가량 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 틈을 타서 촉마왕은 다시 격리술을 시전했다. 이번엔 격리됨과 동시에 눈과 코에서 피가 흐르고, 피를 토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격리되는 횟수가 이보다 더 늘어나게 되면 승산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악이 받쳐 올랐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고, 전부 찢어 죽여야만 한다고 내면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같은 모습으로 피어오르는 무성의 원혼을 보았다. 원혼들은 촉마왕에게 힘을 퍼부으면서도 다시 서글프게 울부짖었다. 대체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사부님!

 원혼을 몇 번쯤 찢어내던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도 대사막에서 들었던 유성의 과거 이야기와 원혼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네 과거는 네 과거일 뿐. 네 녀석의 배신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내게 동정을 강요하기라도 하는 것이냐?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렇게 외치며 남은 원혼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원혼이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되었을 때, 격리술을 풀어내자 무릎에 힘이 풀렸다.

 촉마왕도 더 이상 마계의 힘을 끌어모은 주술을 이 공간에 퍼부어대진 못했다. 마기를 그렇게 공급받으며 마계의 주술을 써댔음에도, 옛 사제는 탈출해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촉마왕은 정말 사부님이 막내 녀석을 홍문신공의 계승자로 인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걸까, 내가 부족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어둠에 물들었기에 그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저 녀석을 죽여서 대사막에서 받았던 설움을 갚고 나 무성이 더 뛰어났음을, 그렇기에 사부의 선택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임을 홍 사부에게 증명하리라. 어둠에 물든 마음은 한 점의 빈틈도 남기지 않고 마음을 검은 색으로 끝없이 덧칠했다.

 격리술이 풀린 후, 얼굴에 손을 가져가 대자 피가 흥건하게 묻어 나왔다. 정신력으로 버티며 촉마왕과 비정한 공격을 주고받았다. 서로 큰 차이 없이 상처만 점점 늘어날 뿐이었다. 서로가 입힌 내상으로 인해 회복력도 점점 떨어져갔다. 공격이 되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머리에, 정확히는 외상 쪽이 아니라 깊은 머리 속 어딘가에서 두통이 퍼졌다. 그와 동시에 잠시 풍경이 여러 겹으로 겹쳐 보였다. 덤벼드는 촉마왕의 공격을 반격해내자 다시금 거리가 벌어졌다. 다시금 짙은 두통이 머리를 두드렸다. 잠시 세상이 멈춘 듯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 침묵을 가르는 작은 목소리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에게 닿았다. 하지만 그는 귓가에 닿은 목소리가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그 목소리가 멍하니 소실될 때까지 인지할 수 없었다.

 잠시 동안의 기이한 현상이 사라지고 이내 전투 중인 현실로 되돌아온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두통이 사라졌음을 알아챘다. 뇌내에 어떤 장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샌가부터 귓가에 맴돌던 슬픈 콧노래는 이제서야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시금 부딪혀오는 공격들을 방어하며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전투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기운 소모가 심해짐이 와닿았기 때문에, 촉마왕과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이번 합에 끝을 보려는 태세를 취했다. 지친 기색이 조금 더 역력해진 그들이 최후의 일 합을 겨루려 할 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허공에서 촉마왕을 향해 손을 뻗으며 내려오는 여자의 환영을 보았다. 하지만 그 환영은 이내 흐릿해졌다.

 그 환영을 본 순간, 지금까지 보았던 장면들과 슬프게 귓가를 따라다녔던 콧노래까지 합쳐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무성과 자신에게 들리지 않는 절규를 해왔던  그리고 손에 모은 마공의 기운을 거두었다. 촉마왕은 덕분에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과거에 함께했던 사제의 몸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꿰뚫린 몸에서 피가 솟구쳤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한 말쯤 될 법한 피를 토하고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장기가 일부 뜯겨나갔기에 아우성을 치는 듯한 통증이 스며들어왔다. 고통을 표출할 힘조차 모두 소모한 전투였던지라 그는 소리없이 고통에 먹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촉마왕은 끝을 내러 내려오지 않았다. 촉마왕과 현재 그의 그릇인 무성의 성격상 자신의 마지막을 꼭 끝내고 싶어할 것인데,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시선을 돌려 허공을 보니 촉마왕이 자신을 꿰뚫었던 손을 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문득 천진권이 자신의 홍문신공을 폐하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사부님 혹은 천진권, 두 사람 중 하나가 자신의 기혈에 최소한의 보험을 들어 두었다는 의미가 된다.

 아마 큰 상처를 입고 신공을 모두 빼앗길 위기가 닥쳤을 때, 그럴 수 없도록 반격하는 술법일 것이다. 어둠의 길에 들게 되면 상대를 죽이며 본능적으로 내공을 취하려 하기 마련이다. 촉마왕도 당연히 그 수순을 밟았으리라. 천하사절 정도 되는 자들이 '무언가' 수를 써 뒀다면, 장시간의 전투로 체력과 부상이 생긴 촉마왕으로써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촉마왕은 몸부림을 쳐 봤지만, 이내 몸이 굳어 추락했다. 기괴하게 꺾인 몸을 한 채로 추락하고 있는 촉마왕은 타버린 것처럼 스러지더니, 다시 그릇인 무성의 모습으로 돌아온 채 쓰러졌다. 그리고 무성은 과거 자신의 사제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공격을 거두었는지를.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흐릿한 형체가 풍경에 겹쳐져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무성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가 가리킨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무성이 촉마왕과 거래한 것은 분명히 그 자신의 영혼일 터. 힘을 받아 쓰고도 패배했으니 그 대가는 혼을 영원히 어둠에 사로잡히는 것이리라. 그가 고개를 들어 흐릿한 형체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을 때, 그 영혼은 어둠의 손으로 떨어졌다. 만신창이가 된 무성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허탈했다. 복수의 일격을 거뒀건만, 결국 남은 것은 비참하고도 허망한 풍경이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복수를 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어둠이 속삭였다. 그의 몸에서 현계의 것이 아닌 기운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혼만 아직 몸에 머무르지 않을 뿐, 숨은 붙어 있다. 죽이자. 죽여버리자. 마지막 기회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독촉했다. 어둠은 정신을 좀먹으며 마공을 부상이 덜한 왼손에 집중시켜 무성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복수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감각조차도 아득해져가는,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이 칼을 잡고는 왼손을 찍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손바닥 정중앙에 박힌 칼을 뽑아내자 왼손은 오른손보다 더 붉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강한 통증이 한 겹 더 쌓이는 것 같았다. 다시 몸을 일으키자 공중에서 일렁이던 형체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것은 사람의 형체였고, 그 얼굴은 무성의 집에서 보았던 유정의 초상화와 완전히 일치했다. 그 모습을 보자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복수에 물든 마음이 허무하게도 재처럼 타버리는 것을 느꼈다.

 유성이의 어둠이 너무 깊어 접근할 수 없었기에 계속 유성이를 따라다니다 대협을 보고 희망을 가졌지만, 대협도 저를 보실 수 없으신 듯 하여 무작정 이곳까지 따라왔습니다……. 유정의 영혼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곁을 지나 정신을 잃고 쓰러진 무성의 옆에 섰다. 유정은 그저 무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뒷모습에 어떤 말을 걸어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

 계속 흐릿한 형체가 이곳을 맴도는 것이 신경쓰였습니다. 그리고 제 머릿속에 흘러 들어온 것들로 인해 그 형체가 당신인 것을 알았습니다. 사형을 이렇게 만들어버리고야 만 저를 탓하시려는 것입니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유정의 영혼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향해 돌아선 유정의 영혼은 그 어떤 증오의 감정도 담지 않은, 온화하지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뇨,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한걸요.대협과 유성이가 이렇게까지 멀리 돌아가야만 했던 것도 결국 이 아이의 업보일 테니까요. 유정은 천천히 앉고서는 안타까운 듯 쓰러진 무성의 손을 잡았다. 대협을 제가 이렇게 늦게 만나게 된 것은, 대협께서도 어둠의 길에 발을 들이셨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 대협께서 유성이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리라 믿게 되었습니다. 어둠을 걷어내고 저를 볼 수 있게 된 것과, 유성이를 죽이지 않고 복수 대신 용서를 택하신 것은 대협의 근원이 선함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대협이 그 위에 덧칠한 어둠을 완전히 걷어내는 날이 오면 이 아이는 구원을 받고, 대협의 그 은혜가 온누리에 빛을 가져올 것입니다……. 유정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무성 사형과 당신에게 있었던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형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어째서 저를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유정에게 물었다. 유성이가 정작 복수를 하려는 이유인 제가, 그걸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대협도 결국 유성이를 죽이지 않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유정이 고개를 들자 서글픈 표정이 드러났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유정의 얼굴에 환영이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꼭 살아남으라 하시면서도, 복수만은 극구 말리시던,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사부님의 환영이. 그는 사부님의 환영을 본 순간 무릎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어쩌면 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 원한 것은 이게 맞겠지요. 지금에 와서야 사부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수의 길은 공허했습니다. 복수가 성공하기 직전이었는데도 희열감이 차오르지 않았어요. 타오르는 증오심은 모든 것을 태우고 나면 그 자신마저도 태워버리고 맙니다. 결국 남는건 꺼져가는 증오의 불씨와 잿더미가 된 마음 뿐이겠지요. 이건 무성 사형이 운명과 어둠에 의해 만들어진 악인인 것을 제가 알게 되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참회의 제를 지내야겠습니다. 모두를 위해서요. 지금까지 제가 저질러온 악행은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이미 존재하는 죄악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천명제가 다가오기 전, 모든 것을 정리하고자 제를 지내둘 것입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기구한 운명에 휩싸인 이 남매를 한참 바라보다 얼굴에서 서글픔을 지워냈다. 그 자리에 남겨진 표정은 유정이 지었던 것과 같은 온화함이 느껴졌으나, 눈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불명확했다.

 저는 사형을 데리고 무일봉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제게 남겨진 모든 일을 끝내야 사형을 되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에, 지금은 무일봉을 지킬 수 없습니다. 무성 사형께서  나쁜 꿈을 꾸지 않도록 사형의 곁을 지켜주십시오. 한참의 침묵 끝에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가 입을 열었다. 유정의 영혼은 알았다 대답한 후 거듭 가볍게 목례하며 사라졌다.

 무성 사형, 돌아가요. 무일봉으로.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지친 눈꺼풀을 닫으며 읊조렸다. 그 무게는 하늘보다 무거운 시간이 담긴 무게일 터였다. 목소리는 이미 메말라 일말의 생기조차 돌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했던 어느 말보다도 인의가 느껴졌음을 그 자신은 몰랐으리라. 당연하게도 무성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가 조금 전 낮게 읊조린 말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무성에게 말을 걸었다.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 있었지만 마음은 가벼워졌고, 육신이 살아있음에 있어서 어떤 갑갑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남은 힘을 이용하여 최대한 제룡림과 가까운 곳에 작은 용맥을 열었다. 그 용맥 사이로 부축한 두 사람의 형체가 사라졌다.
 
  천명제에서 모든 은원을 끝내고 돌아올게요. 사형, 사저, 그리고 사부님. 원한의 고리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도록 제가 마지막이 되어 끊어내겠습니다. 운이 좋게도 마지막 기운을 써서 연 용맥이 남방대륙의 어느 해안가였기 때문에, 그는 작고 낡은 나룻배에 무성을 태우고 올라 무일봉을 향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가을비가 톡톡 떨어지다 후둑거리며 풍경을 적셨다. 그렇기에 그의 눈가에 맺힌 것이 수 년간의 회한임을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상자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후의 최후에서  (0) 2015.09.23
그녀의 이름  (0) 2015.07.02
붉은 수면  (0) 2015.07.02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2  (0) 2013.08.09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1  (0) 2013.08.05
1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나는 묵묵히 상자에 잡동사니와 자료들을 담고는 등을 밝히고 남은 기름을 부었다. 역한 기름 냄새가 코와 기도를 잠식하였지마는, 성냥을 그어 던지니 종이 타는 냄새에 점점 묻히는 것이었다. 흔적이 타들어 갔다. 시간의 공백이 생기기 시작이다. 불길은 타닥거리며 그것들을 포식하였으니, 나는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는 가방을 들며 말을 하였다. 흔적을 지웠으니 이제 떠날 것이라고, 평소의 기운을 지우고 무심하게 말을 하였다. 아직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죄 없는 누이에게 나로 인해 폐를 끼칠 수는 없었으니까. 이 이유를 말하지 않는 나를 비겁자라 욕을 하여도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고리를 잡고 돌리기 전에, 자리에 남은 이들을 보았다. 너무도 평온하여, 문고리가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듯하였다. 고장이 난 게다. 고장이 나야만 설명이 가능할 터였다. 일부러 문고리를 거칠게 여러 차례 돌리었다. 나도 모르게 힘을 주어 문고리를 돌리고 말았다. 이런, 고장이 나지 않았다. 왜 힘을 주어서는 말이야. 깊게 숨을 내쉬었다. 먼저 간다고 원망은 않을 터이니, 나중에 나 왔을 때 마중이나 나와 주시지요. 그리 말하고 바로 문을 닫았다. 돌아올 대답이 두려워서 이러는 게지, 어리석은 놈. 내가 그리 비판하며 심장에 문을 열라고 냅다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그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려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들에 대한 소식을 접한 것은 일간지 한 면에서였다. 총독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의 자제들이 줄줄이 엮인 일이니 당연한 일일 테지. 멍청한 자식들, 거기서 나온 것은 대단치 않을 게다, 라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조심스레 내려놓은 줄만 알았는데 쨍한 소리가 방을 울렸다. 코웃음이 나왔다. 알고 있었는데, 신문에서 다시 접하였다고 이렇게나 동요하는 모양새를 보인다니 병신 모양새가 따로 없었다. 신문을 대충 접어 팽개치고는 방으로 올라갔다. 
 
 헌데, 이리 나온 내가 다시 할 수 있는 것이 무어란 말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여기 누워서 심장이 멎어버리던가, 암살당하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그래서 웃었다. 그것 말고는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도 없었을뿐더러, 나 자신이 너무나도 우스웠기 때문에. 
 
 
 
 
 폐인 꼴을 하고 몇 년을 더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아버지란 작자는 내가 이런 꼬락서니인 것을 알리기 싫었을 테니 신체적 문제로 위장하고 입원을 시켰을 뿐이다. 먹고 숨을 쉬고, 잠드는 것이 전부였다. 매번 눈을 뜨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저주하였다. 어딘가에 놀러 가려 해도 떠오르는 얼굴들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 날 죽었다면 어떠하였을까. 그리 생각을 해 보아도 누이 생각이 나서, 그 자리에서의 죽음만은 아니라는 결론이 다시 도출되었다. 
 
 과연 그것이 맞는 결론인가. 그런 의문을 던져보았다. 내가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 누이에게 폐가 될 거라는 게 과연 합당한 이유인가. 몇 시간 동안 병원의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그 생각만을 하였다. 새로이 도출된 결론이란 녀석은, 맞지만 아니라 말을 하였다. 어찌 그러한가, 답을 뒤적이니 그 녀석은 이리 말을 하는 것이다. 네놈은 누이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는 팔자 좋은 핑계로 죽음에서 떠나간 게다. 그리고 그들이 하려던 의무에서도 말이야. 역한 냄새를 맡지도 않았고, 담배 연기가 새어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숨이 턱 막혀왔다. 그 녀석, 아니 나는 다시 심장의 문을 두드리며 고문을 시작하였다. 나는 그 격한 노크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는데도. 
 
 넌 한심하게도 비겁자. 도망자야. 
 
 
 
3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하여 정상적인 얼굴로 모두를 맞았다. 매끈한 원래의 얼굴, 정돈된 옷매무새.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에 전반적으로 드리운 미소. 완벽하였다. 양부란 작자의 의무적 언어를 귀로 맞이하고는 흘려보냈다. 어머니와 누이에게도, 미안하지만 가짜 대화를 내뱉었다.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제 어마어마한 사기를 칠 터이니. 
 
 이전의 생활로 돌아오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아니하였다. 3년이 지났다는 것을 인지하고, 여러 가지를 찾아보았다. 자주 열리는 연회들, 그곳에 참석하는 이들. 자주 들어온 익숙한 이름이다마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던 자들이다. 퍼서석 밟히는 듯이, 웃음이 나왔다. 그와 더불어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배경에서 탈출하였다. 좋은 생각은 으레 불청객이기 마련이다. 유쾌한 이취를 고안해낸 나는 폭소하였다. 어마어마하다. 물론 나의 이 생각이 말이다.
 
 내가 한껏 몸단장하고, 매무새를 다듬으며 요란스럽게 외출준비를 한 것은 그 날로부터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빗으로 머리를 털듯 빗어내고는 새 구두가 걸을 때 내는 소리를 감상했다. 그렇게 한껏 준비한 후에, 이전처럼 편안한 새 자동차를 타고 연회 장소로 향하였다. 세월의 흔적 따위 없는, 이질적일 정도로 깔끔한 외관을 보아하니 신축된 건물이렷다. 가볍게 하차하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마 조금 전 즈음에, 이곳으로 보내두었던 물품이 도착하였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무게를 더하다 보니 어느새 저도 모르게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었고, 엘리베이터는 연회장이 있는 층에 멈춰 섰다. 
 
 형식적인 웃음, 형식적인 인사를 하는 동안 나를 헤집는 여러 시선이 느껴졌다.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까지의 것들과 다를 바 없을 테니까. 경멸, 동경, 호기심. 퍽 모순이다. 이중적이면서 어딘가에 속하지도 못하는 내게는 당연한 시선이었고, 지극히 당연하였다. 단지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자아라는 조각상을 완전히 박살 낸 후, 새로운 조각상으로 재조립하는 것과 같은 과정. 그러한 것이다. 
 
 과거의 감상 따위는 이쯤에서 헤어져도 무방하기에, 녀석을 망각이라는 것 위에 띄워 보냈다. 아마 연회장과 동일한 층에 있는 창고들에 물건이 도착해 있을 터였다. 친목을 다지는 연회장의 무리 사이로 빠져나오며 구두 굽의 소리를 살해하였다. 문을 닫고 나오면서 창고로 향하니, 물건과 더불어 예상치 못한 선물이 나를 맞이하였다. 정말로 선물인지, 그저 운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건물에서 다용도로 사용될 연료들, 즉 기름과 탄들이었다. 나는 그만 물건을 맞이하기 전에 그 선물 앞에 먼저 다가갔다. 순간 떠오르는 선물의 친구들이 있었기에 주머니를 더듬어 보니 단짝이라는 녀석이 고개를 내밀었다. 연회장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곧 식이 시작인지, 약간 떨어진 이곳까지도 음파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망설임 없이 창고의 선물들을 엎고, 여기저기 흩뿌렸다. 그리고는 빠르게, 성냥이라는 녀석을 그어 던지고는 서류가방 안의 물건을 챙겨 연회장의 문으로 향했다. 건물 구조상 안타깝게도 이곳의 출입문은 단둘이었는데, 나는 조용히 아가리를 다물고 있는 문짝들을 완전히 침묵도록 만들 계획이었다. 
 
 구석에 내팽개쳐진 건축 자재들로 문을 봉쇄한 후, 화염이 커지기를 기다렸다. 마치 차가 우러나길 바랐을 때처럼. 얼마나 지났는지 세지는 못하였지만, 문 밑으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고, 소리가 엉망이 된 것으로 보아 꽤 성공적일 터였다. 여전히 운이 좋은 것일까. 이상함을 눈치채고 연회장으로 올라오는 이가 없었다. 안에 있는 자들이 저들의 여흥을 위하여 하수인들을 멀리 보내버렸기 때문이겠지. 저들은 의도치 않게 제 무덤을 판 것을 후회하게 될 운명이다. 온몸이 불길 안에서 잘근잘근 씹히는 고통과 함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를. 나는 언제나처럼 만면에 미소를 드리웠다. 시간이 더 지나기를 기다리니 벽과 문마저 뜨겁게 열이 올랐다. 봉쇄했던 문을 다시 열고 슬쩍 밀어 보았다. 대부분 자신이 들어왔던 반대편 문짝에 들러붙어 있었는지, 문과 함께 딸려오는 자들이 없었다. 
 
 곧 이 안에 있는 자들과 함께 몸이 부서질 운명이건만, 화염 때문에 활동사진기가 있어도 필름으로 모습을 남길 수 없겠군. 우습게도 이 상황에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아쉬움 이외의 다른 것이라면, 누이가 석탄처럼 처참해진 시신을 알아볼 수나 있을까 싶은 우려. 슬그머니 열리는 문과 함께 매캐한 연기 너머로 아비규환의 연회장이 보였다. 뒤로 숨긴 손은 문을 다시 닫고 있었다. 생애 최고의 유쾌한 장면을 인제야 보다니, 신이 있다면야 장난질이 지나치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역으로 마지막 순간에 최고의 유쾌함을 접하게 되었으니, 원망이란 녀석도 접어두려 함이다. 어차피 내가 소유했던 모든 감정은 내가 불길 속에서 타오르고, 부서지게 되면 운명을 같이할 터이니. 곧 모든 것이 화염에 잡아먹히고, 끝이 날 것이다. 가방에서 가져온 물건을 꺼내고선, 다시는 땅을 밟지 못할 녀석을 공중으로 던져 주었다. 
 
 
 
 굳빠이. 그리 말하며 나는 최후의 인사를 보내었다.
 
 
 
 
4
 
 1933년 모월 모일.
 의미불명의 화재·추가 폭발사고. 대다수 사망. 생존자 중태. 
 

'상자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우(時雨)  (0) 2016.12.21
그녀의 이름  (0) 2015.07.02
붉은 수면  (0) 2015.07.02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2  (0) 2013.08.09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1  (0) 2013.08.05

 북방설원의 설풍은 칼날처럼 매섭다. 피부에 닿는 것이 백설기 파편같은 눈송이가 아닌 검기처럼 느껴진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날카로운 바람을 느끼던 감각이 무뎌졌던 것은. 북방설원을 헤매이는 내게는 답을 찾지 못할 의문이다. 진서연을 죽이고, 나는 북방설원을 정처없이 헤매고 다녔다. 그런 나는 마공의 상승경지에 이른 지 오래라 내 스스로 죽지도 못하는 현실에 그저 비소를 흘리며 고행길을 걸을 뿐이다.

 

 차오른 숨은 하얀 입김으로 녹아나오고, 설원의 한기는 그마저도 얼려버린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설원의 절벽에 올라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눈보라가 하도 강해서인지, 걸어왔던 길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길을 잃을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걸어온 길이 너무 가파른데다, 시야까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섣불리 발걸음을 돌렸다간 절벽 사이로 굴러떨어질 터. 제대로 난 길도 얼마 없는 곳이니 그저 앞으로, 앞으로 향할 뿐이다.
 얼마나 걸었는지에 대한 시간 감각이 사라져 갈 때 쯤, 왼쪽 눈의 검상에서 익숙한 감각이 퍼져나온다. 탁기. 분명 탁기가 근처에서 퍼져나오고 있는 것일 테지. 처음 이 눈을 좀먹기 시작한 것도 탁기였으니 말이다. 수치스럽고 기분 나쁜 과거를 되살리는 이 눈의 감각이 싫다. 힘없이 진서연에게 당하고 무림의 흙탕물을 굴렀던 과거의 내가 싫다. 이 감각을 되살리는 근원을 없애지 않으면 한동안은 계속 기분이 좋지 않을 것만 같다.
 감각이 가리키는 곳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니, 시끄럽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다. 현장을 확인해 보니 바바족 몇과 인간 몇과 잡스런 하급 마귀 몇이 뒤섞여 난리도 아니다. 옆에 있는 동굴에서 탁기가 스멀스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니, 인간이건 바바족이건 어느 쪽이 탁기가 봉인된 동굴을 잘못 건드려 이 소동이 벌어진 듯하다. 동굴 안을 확인해 보니, 그리 많은 탁기가 봉인된 것 같지는 않다.

 

 마귀들은 스물 쯤 되는 것이 수는 꽤 많았지만, 하급이었기에 평범한 검에 검기만 둘러 휘둘러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아직도 뒤엉켜 있는 바바족과 인간 몇을 본다. 바바족들은 이미 마물화가 시작된 듯, 눈빛이 마족의 것으로 변한 채다. 마물과 같이 운명을 달리하는 수밖엔 없다. 나는 이쪽으로 달려들던 바바족들도 전부 일격에 참한다. 그 곁에 상처를 입은 채 쓰러져 있던 인간들의 상태도 다가가 확인해 본다. 그래도 아직 탁기에 물든 자는 없는 듯하다. 굳이 인간을 이유없이 먼저 죽일 일은 없으니 다시 길을 떠나려 한다.

 

 "으랴아아!"
 쓰러진 척하고 있던 것이었는지, 몇몇이 무기를 빼들고 내 뒤를 치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면 죽일 수밖에. 검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도 낙화마냥 힘없이 떨어지는 시신들이 덧없다. 무모한 짓을 하려 했으니 덧없이 가는 것이 당연하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아 남은 인간도 죽이려 고개를 돌린다. 나머지는 전부 죽은 듯, 나보다도 더 앳되어 보이는 소녀 하나만이 있다. 그녀는 옷을 탈탈 털고 일어나더니 내게 포권의 예를 표한다.
 "저, 저기, 저를 구해 주신 건가요?" "착각이 심하구……." "아버님이 북방설원에 있는 유명한 문파의 가문과 저를 혼인시키겠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혼인하러 가는 길이었죠. 그런데 정신이 이상한 듯한 바바족 몇이 저희 일행을 공격하고는 이 동굴 쪽으로 끌고 와서 제 감시들과 뒤섞여 싸우고 있던 차에! 대협께서 나타나신 거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숨도 건지고 혼인하지 않고 도주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맑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꺼낸다. 자신이나 나의 전후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이런 유형의 인간은 여러모로 꽤 귀찮다. 자신보다 강한 무림인이라면 굽신대며 자신의 사정을 불고 뭐든 맡겨보려 하는, 그러면서 돈으로 해결을 보려 하는 녀석들이 대다수다. 귀찮은 듯 듣고 있던 내게, 그녀는 고개를 숙인다.

 

 "저는 진연초라고 합니다. 저를 구해주신 분의 성함이라도 듣고 싶어요."
 이름? 그런 건 이제 내게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라, 원래 있던 것마저 세월의 저 너머로 스러지게 놓아두었다. 알려줄 것이 있을 리 없다. 나는 홱 돌아선다.
 "이름이 없나요? 아니면, 밝힐 수 없을 만한 사정이 있기라도……."
 내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없이 그저 바라만 보아서인지, 그녀는 주춤하며 말끝을 흐린다.
 "……왜 묻나?" "은인의 이름 정도는 알아두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실소가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숨긴다. 은인, 은인이라. 지금의 내가 누군가의 은인이라니, 참 우스운 일이다. 나는 거절의 의미로 검을 검집에 넣고는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사실 거짓말이에요! 이름을 바꾸고 도망쳐서 다른 삶을 살고 싶었어요!"

 

 멀어져가는 내게, 바람이 그녀의 목소리를 보내준다. 나는 순간 멈췄다. 다른 삶이라. 과연 이름을 바꾸고, 자신을 숨겨도 그럴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이름을 가지고 어떻게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그녀가 만약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내게도 가능성이 보일 지 모른다.

 

 "과거의 나의 이름이니 내 행세를 하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다."

 

 부서진 검 조각을 주워 나의 옛 이름을 새겨 건넨다. 그녀는 뭔가 할말이 더 있는 표정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더 들어줄 생각도, 더 대화할 생각도 없다. 나는 빠르게 내가 향하던 원래 길로 되돌아가기로 한다. 그녀는 목적을 달성해서인지, 군말을 삼키고 자신의 물건을 주워 어디론가 떠난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나는 잠시 돌아서서 내 반대편으로 사라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본다. 그녀가 가진 나의 옛 이름의 무게는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다. 홍문파의 마지막 정식 제자였던 나, 그런 삶을 살았던 나의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이름. 하필 만나도 나를 만나서 그런 이름을 가져가다니……. 새로운 삶을 살아갈 기대에 부푼 그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 이름을 받은 이상 그리 순탄한 삶이 펼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쩐지 쓰린 느낌이 든다.

 

 나는 그녀의 옛 이름을 기억한다. 그리고 과거의 나를 영원히 잊기 위한 수단으로 버려진 이름을 가진다. 그래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름을 말하게 된다면 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별 볼일 없는 떠돌이, '진연초'라고.


-



작년에 샌박에 올렸는데 백업안해서 재업

 

 

'상자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우(時雨)  (0) 2016.12.21
최후의 최후에서  (0) 2015.09.23
붉은 수면  (0) 2015.07.02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2  (0) 2013.08.09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1  (0) 2013.08.05

 

B는 게시판에 붙은 전교 등수 표를 확인했다. 전교 2등, 그것이 이번 시험의 결과였다. 이번에는 특히 '학교 공인 역대 최고 난도 시험'이었기에, B는 승리욕을 불태우며 공부 시간을 늘렸다. 끼니를 거르고 잠을 줄이며 어떻게든 공부 시간을 늘려 보았지만, 이번에도 참패였다. 게다가 전교 1등 A는 전 과목 만점. B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번엔 A의 앞에서 성적이 올랐다며 허세를 부리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B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끌고 교실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A와 B는 같은 반이다. 그래서 B는 더 힘들었다. 담임교사가 성적을 쭉 불러주던 중, A의 이름과 점수가 불리면 곳곳에서 아이들의 '오오'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반 1등이자 전교 1등이라는 담임교사의 덧붙임이 있었다. 모두 B에게만 관심을 집중했다. 2등인 B에게는 A의 반만큼의 관심도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A는 그런 관심의 주역이면서도 부끄러운 듯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B는 A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고역이었다. A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반만큼도 공부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성적은 매번 전 과목 만점이기 때문이었다. B는 A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A의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어, 귀를 틀어막고 엎드렸다. 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B에게는 성적 발표 시간에 자는 잠이 최후의 안식처였다. 잠들면 A에 관한 모든 것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번만큼은 성적 발표 시간에 잠들고 싶지 않았던 B였지만, 결국 다시 잠을 청하게 되었다. 잠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B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B, 어디 아파?"
 
B에게는 재수 없고 듣기 싫게 느껴지는 상냥한 A의 목소리였다. 저리 가라며 A를 뿌리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힘도 없었기에 B는 반응하지 않았다.
 
"B, 괜찮아? 양호실 갈래?"
 
걱정스레 B를 붙잡으며 묻는 A의 말에, B는 차라리 양호실에 가면 잠들기 전까지 편하겠다 싶었다. B는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와 책상이 밀리며 끼긱거리는 기분이 나쁜 소리를 냈다. A는 힘없는 B의 손을 잡고선 교사에게 B를 양호실에 데려다 주겠다 말하며 교실 문을 나섰다. 성적에 대한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흐릿해지자 B는 조금 살 것 같았다. B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대화도 없는 것이 어색했는지, 옆에서 A가 쫑알쫑알 쓸모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B는 미묘하게 얼굴을 구기며 약간 얼굴을 틀었다. 그러다 마침 A가 민감한 곳을 건드렸다.
 
"아, 맞아. 나 이번에 성적 올랐어! 너도 오른 것 같더라. 어땠어, 이번 시험? 난 어려웠는데."
 
B는 얼굴을 구겼다. 마침 A는 B보다 약간 뒤에 서 있어서 B의 표정변화를 읽지 못했다. A는 B와 말하고 싶은 순수한 의도였지만, B에게는 그것이 치명적인 내용이었다. B는 머리에 피가 쏠리고 손이 덜덜 떨렸다.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듯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양호실은 혼자서도 갈 수 있어."
 
B는 떨리는 손으로 A를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뒤에서 A가 같이 가자며 따라왔다. B는 가증스러운 A의 목소리를 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폭발할 것만 같았다.
 
"B, 혼자서 괜찮겠어? 같이 가자."
"됐으니까 가!"
 
A에게 등을 보인 B가 애써 말했다. 언성이 조금 높아졌지만, 마음속에 뭉친 응어리에 비하면 오히려 평범할 정도였다. A는 B가 걱정됐는지 계속 B를 돌아보며 느릿느릿 교실로 향했다. 뒤돌아본 시야에서 A가 사라졌을 무렵, B는 다시 양호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서 빨리 방해받지 않고 잠들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쁜 기분을 A가 더 나쁘게 했다. 조금이라도 자면 A에 관한 것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양호실로 향하며 B는 A가 꺼냈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왜 하필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자신을 비웃으려고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사실 A는 정말 순수한 의도로 별생각 없이, 그저 할 이야깃거리가 떠오르지 않아 성적 말을 꺼냈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B가 그런 걸 알 리 없었다. B는 그저 A가 싫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어느새 B는 양호실에 도착했다. 대충 꾀병을 부리니 양호선생이 침대에 누워 쉬라고 했다. B는 흰 커튼이 쳐진 침대에 누웠다. 침대 주변으로 쳐진 하얀 커튼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B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졸리지 않아 계속 뒤척였다. 왜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 걸까 하고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잠이 안 오네……. 깨면 머리만 복잡한데.'
'어제 너무 일찍 자서 그런가?'
'시험이 끝났으니까 좀 일찍 잘 수도 있지, 뭐.'
'시험이 끝…….'
 
어째선지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은 시험이라는 주제에서 멈췄다. B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대로 잠들기를 기다리다간 무언가 더 쌓일 것만 같았다. B는 양호교사에게 머리가 아파 잠이 오지 않으니 수면유도제를 달라고 했다. 양호교사는 B를 살짝 훑더니 표정이 좋지 않음을 보고 수면유도제를 꺼내 주었다. B는 약을 삼킨 후,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꼭 감은 채 침대에 다시 누웠다. 얼마 후 B의 몸에 힘이 풀렸고, B는 조용히 잠들었다.
 
 

 

'상자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후의 최후에서  (0) 2015.09.23
그녀의 이름  (0) 2015.07.02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2  (0) 2013.08.09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1  (0) 2013.08.05
[검방4/스포] Responsibility 3  (0) 2013.07.07

21장. 칼날이 향한 곳

 

 

탁기를 내보이기 시작한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표정엔 거침이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칠 뻔하다 자신을 알아본 주민을 죽인 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겁먹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사부님을 욕보이고, 더러운 모습을 보였던 마을 주민들의 모습만이 끝없이 나타났다. 문득 살아남고 이득을 취하기 위해 남의 목숨을 밟고 선 주민들은 죽이는 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이름 모를 무인이 도착한 유가촌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마을에서 있었던 일과 다르게 언제나 평화로워 보였던 마을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생지옥이 되었다. 마공을 사용하는 무인은 마을 사람들을 하나하나 마물로 만들어 나갔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도망치고 비명을 지르다 붙잡혀 소환귀가 되었고, 나머지는 이미 마물이 된지 오래였다. 하늘은 어둡게 변했으며 마을에는 사람의 소리란 들리지 않았다. 소환귀가 되기 직전의 마지막 발악, 그리고 마물들의 소리만이 유가촌을 울렸다. 마지막으로 무인은 한손에 끌어모았던 탁기를 마을에서 폭발시켰다. 그리고는 돌아서선 입구에서 죽였던 시신을 밟으며 마을을 나섰다. 등진 마을에선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나며 하늘을 가렸고, 무인의 얼굴을 스친 모래바람에 아릿하게 피냄새가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지난날 대사막에서 보았던 마영강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도 이 유가촌 주민과 다르지 않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진서연에 의해 흔적도 없이 죽고 말았기에 복수를 할 수 없었다. 곤란한 입장이 되었다. 손에 피를 더 진하게 묻혀야 마공을 잘 다룰 수 있을 터. 그 주인이 없으니, 군대라도 없애버리는 게 좋겠다 여겼다.

 

그가 그런 결심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막 전역에는 어느 살인귀가 마영강군을 전부 도륙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무능한 운대륙군은 그 살인귀가 고수란 소식에 벌벌 떨었고, 그를 틈탄 별 볼 일 없는 범죄자들이 활개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살인귀라 불리우는 존재가 지나가기만 하면 범죄자들도 그저 시체에 불과했다. 살인귀는 그저 대사막을 방황했다. 그에게는 대사막의 건조한 모래폭풍도, 뜨거운 열기도, 덤벼드는 존재들도 전혀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복수가 너무나 하고 싶었고, 아직 그것이 현실이 되지 않았기에 어떤 식으로든 아직 이루지 못한 복수의 칼을 쓸데없는 곳에 휘두르고 다닐 뿐이었다.

 

그렇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가 대사막을 방황한 지 꽤 시간이 지나서였다. 마물이 되어버린 옛 사형이자 배신자를 만나고야 말았다. 지나가던 마물이 어쩐지 눈에 익어 발걸음을 잠시 멈추니, 진서연에 의해 그리 변했던 배신한 사형의 마지막 모습과 같았다. 홍문파의 막내는 그 마물이 정말 배신자이자 옛 사형이란 것을 확인하고 조소했다. 그렇게 복수에 집착하며 배신을 해댄 결과가 결국 이런 식이었다니. 의식도 없이 그저 의미 없는 울부짖음만 반복하는, 저주받은 삶을 얻은 게 배신의 끝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영원히 찢어 죽여도 모자랐지만, 이미 마물이 되어 버렸으니 영원히 마물로 고통받게 두는 것이 고작 최선이었다.

 

배신한 사형을 지나친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어느덧 다시 열사지대로 돌아와 헤매이고 있었다. 모래와 하늘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던 시야에 아지랑이와 함께 어떤 형체가 그의 눈에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유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자신에게 뭔가 전할 말이 있기에 유란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유란은 그를 보더니 픽 웃고는 이런 곳에서 저런 것들이나 죽여서 그릇이 채워지기나 하겠냐고 비꼬았다. 그러면서 차라리 이런 잡것들만 있는 대사막보다는 수행자들이나 문파들이 더 있는 백청산맥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유란을 따라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지우고 있었다.

 

 

 

 

-

 

엔씨가 안만들면 내가 상상할거야

'상자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녀의 이름  (0) 2015.07.02
붉은 수면  (0) 2015.07.02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1  (0) 2013.08.05
[검방4/스포] Responsibility 3  (0) 2013.07.07
VANITAS VANITIUM ET OMNIA VANITAS  (0) 2013.07.06

 

20장. 다짐이 향하는 곳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의 눈 앞에는 목숨과 모든 내공을 쏟아부어 자신을 치료해 준 팔부기재의 마지막 모습이 스쳐갔다. 그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였다.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복수를 하겠단 결심이. 이래서는 복수의 길을 걷는 도중에 이도저도 아니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는 백림사 본당에서 선택을 한 후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백림사 본당 안에 들어온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삼사년 전 쯤부터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있었던 홍문파 도복을 꺼냈다. 사부님과 사형, 사저들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 후 배신자 무성의 얼굴이, 진서연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들로 인해 비참하게 죽어간 사형과 사저들의 싸늘하게 식은 모습이 기억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꼭 살아남으라고 외치며 한 줌 재가 되고 만 사부님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라서, 눈가가 시큰해졌다. 막내야, 꼭 살아남거라. 그 말은 마음 속에 낙인처럼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게 홍문파 식구들의 유언은 복수심을 기르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살아남아서, 진서연 일당과, 무성을 막내의 손으로 죽여달라는 뜻으로 비틀리고 말았으니까.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도복 위에 얹은 손을 꽉 쥐었다. 말끔하게 접혀 있던 도복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현담대사 앞에 섰다. 마음을 정했는가? 현담대사가 물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이미 결정은 내린 지 오래되었고, 흔들릴 리 없다고 말했다.

 

현담대사는 자신 앞에 선 대협을 보았다. 그 눈빛만 보아도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묻기로 했다. 어떤 선택을 했느냐고. 대협은 망설임없이 입을 열었다. 마도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보게, 하며 현담대사는 그 눈빛이 꺼지도록, 단 한 번이라도 더 말리고 싶었다. 자신이 했던 과거의 선택이 어떤 일을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이 대협이 자신의 결정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한다면 오죽 좋으련만.

 

말리실 생각이라면 그만두라는 대협의 말에 결국 현담대사는 이 대협의 선택을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는 제단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제단 앞으로 걸어가 검붉은 불꽃이 넘실거리는 화로에 홍문파 도복을 태웠다. 그렇게나 추억이 깃든 도복을 불태우는데도,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타오르는 도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걱정 마세요. 사부님, 사형, 사저. 제가 꼭 원한을 풀어드릴 테니까.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 줌 재가 된 도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백림사를 떠났다. 그는 진짜 결심을 보여줬다는 의미로 유란이 보낸 마도신공 수련복을 내려다보았다. 정이 가는 옷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이 길을 걸을 것이니, 차차 가까워지면 그만이었다. 이제 어둠을 수련하고, 마공을 다스려 복수하는 일만 남았다. 말로써는 간단하지만, 정작 시도하면 험난한 길일 터였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그 첫걸음을 떼기 위해, 용맥을 타고 대사막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온 대사막은 여전히 황량하고 기분 나빴다. 이 넓은 곳을 돌아다니며 있었던 모든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사부님이 모욕당하고 자신은 살인자로 몰렸던 일, 멍청하고 탐욕스러운 관리들에게 이용만 당했던 일, 배신자 무성을 만났던 일, 온갖 더러운 인간군상을 만났던 일…….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 일들을 겪었던 순간만큼 화가 치밀어올랐다.

 

유가촌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무성이 왜 그리 됐는지도 알 법했다. 무성을 이해하고 용서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왜 그런 인간이 됐는지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있었다. 권력 앞에서는 약자가 되고, 그 권력을 등에 업고선 약자에게 강자가 되는, 그런 사람들이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마을기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무색하게, 유가촌은 여전히 조용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이것이 시덥잖은 뒤끝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이내 마음 저편으로 넘겨버렸다. 그렇건 아니건,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이것은 어둠을 수련하기 위한 피 몇 방울일 뿐이었으니까.

 

'상자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붉은 수면  (0) 2015.07.02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2  (0) 2013.08.09
[검방4/스포] Responsibility 3  (0) 2013.07.07
VANITAS VANITIUM ET OMNIA VANITAS  (0) 2013.07.06
[검방4/스포] Responsibility 2  (0) 2013.07.04

"뭐?"


"……제가 처음 깨어났을 때 부터 자꾸 똑같은 장면이 꿈에서도, 깨어 있을때도 생각나요."



사건에 대한 기억을 숨기고 있었다는 줄 알고 놀랐다. 염통이 쭈그러드는 줄 알았네.



"어떤 장면인가?"


"벽이 있고, 벽 너머엔 어떤 금발 여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저한테 계속 살아달라고 말했어요."



금발의 여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미궁 교주실에서 보았던 장혜진의 시신이 떠올랐다. 태현 군도 허강민과 장혜진이 같이 있었다고 했으니 아마 지금 허강민의 남은 단 한 조각의 기억은 장혜진의 최후……겠지. 하지만 두번째 사건에서의 장혜진은 누군가에게 살아달라고 말할 사람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만, 사람은 변하니까.



"매너 없는 놈."


"네?"



내 말의 의미를 묻는 그의 물음을 무시하고 차의 속도를 올렸다. 한창 운전하는 중에 휴대전화가 울려서 무시하려고 했지만, 허강민이 자신이 받으려는 듯 휴대전화에 손을 뻗으려 해서 얼른 휴대전화를 낚아채 화면을 보니 태현 군의 오랜만의 전화였다. 나는 태현 군의 전화임을 확인하고는 운전중이지만 전화를 받았다. 두 달만에 듣는 목소리는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전직 교통순경이 운전중인 운전자에게 위험하게 전화를 받게 하다니! 자중하게!"


"죄송해요. 무열 선배…… 아니, 형."


"오랜만이군. 무슨 일인가?"


"아, 저, 그게……. 부모님께 사건에 대한 얘기는 빼고 둘러대다가 형 얘기도 했는데, 그랬더니 부모님이 몸도 불편한데 아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게 좋지 않겠냐고 하셔서 말이죠……. 괜찮으시다면 신세 좀 져도 될까요? 아마 며칠에서 일주일 쯤 후에 찾아갈 것 같아요."



미안함과 어색함이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와 부모님이 권했다는 내용, 그리고 퇴직일에 사무실로 찾아오라고 권한 내 말때문에 나는 태현 군이 사무실로 찾아오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사실 그가 오는 게 싫지는 않다. 이전 사건들에서 나의 좋은 조수로 활약해 줘서 오히려 내가 편했으니까. 하지만 허강민이 내 사무실에서 지내게 된 이 상황에 그가 오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일단 내가 먼저 권한 일이니 승낙하고 그 뒤의 일을 생각해야겠군.



"알겠네. 빨리 오면 좋겠지만 몸도 성치 않으니 천천히 오게."


"네. 그 때 뵈죠."



통화를 끊고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었다. 운전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저 둘에 대한 문제가 머리를 심히 지끈거리게 만든다. 다른 의미로 나와는 악연이군. 집중력이 분산되고 저들의 문제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짜증이 나서, 나도 모르는 새에 얼굴을 찌푸린 채 운전하고 있었다. 룸미러로 본 내 얼굴은 참 가관이었다. 안그래도 중년이라 주름이 늘어가는 얼굴에 찌푸려서 생긴 주름이 늘어나니 참 나도 노안이 아니던가.



잠시 주변의 사람 없는 건물 주차장에 차를 대충 세우고 편의점에서 빵과 음료수를 사 왔다. 허강민의 몫도 건넨 후, 빵을 씹고 음료수를 몇 모금 마시며 말했다.



"자네 기억도 없고, 아직 완벽한 완치까지도 아니고, 내 개인적인 사정도 있어서 그런데 사무실에서 자네가 지내기는 조금 불편할 걸세. 불편해도 괜찮겠나?"



그는 잠시 턱을 잡고 바닥만 바라보더니, 고개를 들고 바로 당연한 듯이 대답했다.



"네. 과거엔 우리가 어떤 사이로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도와주시는 입장인데 더 바랄건 없겠죠."


"고맙네. 그럼 일단 사무실로 가지."



어떻게 할 지 대책은 아직 하지도 못했지만 가면 뭔가 생각은 나겠지. 그렇지만 사무실을 얻은 지 두 달이 조금 넘었는데도 두 인간을 돌보느라 정리를 완벽하게 하지는 못했으니 잠시 허강민을 부려먹고 생각을 해 보자. 착해지니 조금 부려먹기 좋군.



나는 우리가 다 먹은 빵 봉투와 음료수 병을 편의점 봉투에 던져넣다시피 한 후,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차 열쇠를 돌려 시동을 걸고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허강민은 다시 말이 없어진 채 창 밖만 바라보았다. 잠시 그 모습이 기억을 잃기 전의, 공허한 눈을 했던 '설계자' 허강민과 겹쳐 보여서 괜히 잠시 눈을 비볐다. 그리고 20분간 아무 영양가 없는 시간을 운전에 쓴 후 나는 사무실 건물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 허강민과 차에서 내렸다.



"내 스위트 오피스에 온걸 환영하네."


"아, 네……."



기대에 미치지 않는 반응과 당황한 듯한 표정에 민망하여 헛기침을 큼큼 하고 앞장서서 건물의 계단을 올랐다. 허강민은 차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따라올 뿐이었다.



계단을 올라와 2층 사무실 문고리에 열쇠를 꽂았는데, 정확히 맞물리기는 했지만 이유없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욕설을 입 안과 마음 속에서 잘근잘근 씹어 가며 쩔걱쩔걱 돌아가지 않는 열쇠를 돌리다 보니 드디어 열쇠가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 채 정리되지 않은 상자 옆에 나뒹구는 빈 상자를 발로 뻥 차고 그 너머에 있던 소파에 털썩 앉았다. 허강민에게 앉으라 말하려는데 거리낌없이 앉아서 혼자 속으로 멋쩍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이제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서 말해주겠네. 자네는 3층에서 생활하게 될 걸세. 웬만하면 3층에서 나오지 말고, 내가 책상을 세 번 두드리면 인기척도 줄이고, 나오지도 말게."


"왜죠?"


"말하자면 장황하니 묻지 말게나! 내 입이 지쳐 나가떨어지는 모습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일세."



그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태현 군을 바로 만나면 기억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몰라 일단은 존재를 숨기려고 한 것이지만 말해주기엔 조금 위험하니 아예 함구하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다. 태현 군이 이곳에서 일하다 보면 언젠가는 들키겠지. 하지만 다시 만나게 하기는 위험하다. 허강민의 기억 회복의 가능성과 태현 군에 대한 기억이 조금이라도 회복되면 어떤 일이 생길 지 모르니…….



"일단 사무실 정돈이나 마무리지으세."


"네."



빈 박스를 가져와 접은 뒤, 문 옆에 둔 후 허강민에게 물건이 들어있는 짐을 옮기게 하고, 정리를 시켰다. '무대'에서 어르신 대접을 정말 예의있게 해준 대가로. 어차피 그것에 비하면 별 일도 아니니까 큰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이 자식을 이런 때 아니면 언제 이렇게 부려먹겠어?



허강민이 땀을 뻘뻘 흘리며 상자에 든 남은 짐을 꺼내는 동안,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고 전선을 정비하려고 했지만 전선 정비는 너무 복잡해서 손도 댈 수가 없었다. 언제 봐도 PC는 너무 어렵다. 책상 앞에서 PC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을 때, 허강민이 물건을 다 넣어두었다고 했다. 역시 힘 쓰는 놈 하나는 있어야지.



"물 한잔 마시고 내 말 듣게."



물컵에 물을 따라 건네자 허강민은 몇 모금 먹지도 않고 컵을 내게 줬다. 수자원도 낭비하지 않는 좋은 조수다.



"이 건물은 구조도 독특하고, 주차장도 공짜라서 낼름 내가 구했지. 2층과 3층 쪽방 둘은 내가 샀다네. 뭐 사실 쪽방이라고 부를 만큼 좁은 방은 아니네만, 한 층의 면적에 비해선 작은 편이니 그냥 쪽방이라고 부르겠네. 어쨌든 3층의 두 쪽방과 2층 사무실은 조금 공사를 해서 연결할 걸세. 자네가 들키기 쉽지 않도록 큰 쪽방에 접이식 사다리 계단을 설치할 걸세. 갑작스러운 공사라 잠시 내 집에서 지내는게 좋을 걸세. 사무실에서 지내자고 해놓고 말을 바꿔서 미안하네만 개인적 사정때문에 어쩔수가 없다네. 알겠나?"


"그럼 저는 대부분 쪽방에서 갇혀 지내야 하는 겁니까?"


"내가 지시할 때만."



갑자기 그가 두려움과 의문이 살짝 드러난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말했다.



"도대체 무엇이 저를 이렇게 만든 겁니까? 전 어떤 사람이었죠? 그 사정이 뭐길래, 이렇게 민폐가 되어야 합니까?"


"그건 천천히 말해주겠네. 기억에 혼란이 올 수도 있어!"


"……."



허강민이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떨궜다.



"기억에 혼란이 오면 나중에 기억을 되찾았을 때 힘들어지는 건 자네야. 소파에 누워서 잠시 머리나 식히게."



뒤돌아 사무실 문을 닫고 나왔다. 천천히 말해주기는 개뿔. 말해줄 수도 없고 아직은 말해서도 안 돼. 사실 이것도 변명일지 모르지. 그냥 갑자기 그 표정에 당황했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말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허강민이 머리를 좀 식히기를 바라며 걸어 나온 길을 뒤돌아 바라본 후,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계단을 걸어 나왔다. 그리고 이유 없이 주변 거리를 걸었다. 그래, 내가 바란 대로 그가 잘 숨어서 최선의 방향으로 흐르면 좋겠군.

'상자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2  (0) 2013.08.09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1  (0) 2013.08.05
VANITAS VANITIUM ET OMNIA VANITAS  (0) 2013.07.06
[검방4/스포] Responsibility 2  (0) 2013.07.04
[검방4/스포] Responsibility 1  (0) 2013.07.04

 여름─ 한 해의 네 철 가운데 둘째 철. 봄과 가을 사이이며, 낮이 길고 더운 계절로, 달로는 6~8월, 절기로는 입하부터 입추 전까지를 일렀다. 현재는 의미가 약간 바뀌었는데, 그 사전적 의미를 기술하자면 이렇다. 

 

 「단일 계절로, 낮이 길고 덥다. 6~8월경 그 특성이 극도로 증가한다.」

 

 이 설명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여름의 특성이 이전 여름의 시기였던 6~8월경 극도로 증가한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증가하는가 하면, 저 시기의 기온과 습도의 평균치만으로도 이해가 가능할 정도의 단순한 특성이다. 평균기온 42.7도, 평균습도 76%. 사람들은 이 극열의 시기에 극하(極夏)라는 이름을 붙였다. 극하는 10년 전부터 나타났다. 그 사건으로 인류의 상당수가 죽었고, 지구의 기후는 격변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극하였다. 이것은 남은 인류마저도 더 죽이는 무서운 존재다. 미칠 듯한 기온과 불쾌지수를 올리는 엄청난 습도 탓에 사람들은 고통스러웠다. 건물 안이나 그늘에 있어도 그저 열기가 덜 할 뿐이지 다를 것은 없으니…….

 

 이 정신 나간 계절이 나타난 이후, 인류는 세 부류로 나뉘었다. 살아가기 위해 진보하는 사람들, 진보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고통을 벗어나려는 사람들, 죽을 용기는 없지만 진보하는 인류는 아닌 보통 사람들. 사실 첫째 경우는 인류 전체에 빗대자면 소수이다. 이 계절을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력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니까. 그들이 개발해낸 것을 이용하는 사람도 포함되는데, 그 개발품들은 비싸니 첫째 경우는 소수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대다수는 둘째 혹은 셋째 경우. 그래도 아직은 셋째 부류가 가장 많다. 물론 나도 셋째 부류에 포함된 사람이다. 죽을 용기도 없고, 첫째 부류가 될 수 있는 조건도 없는 그런 사람.

 

 죽어라, 죽어, 이 저주받은 생명! 가치 없는 살덩어리! 매일 이렇게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며 나를 저주했다. 왜 나란 건 죽을 용기도 없고, 자연사라는 축복조차 주어지지 않는지 원망스러웠다. 진보하는 사람들, 혹은 그들이 개발해낸 것들을 이용하는 자들이 아니라면 모두 고통받는 삶이었다. 하지만 죽을 용기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 삶을 스스로 끝낼 수 있다. 용기라는 엄청난 것 따위는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게는 병이나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축복마저 받지 못한 셋째 부류에 속한 나는 저주를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심하게도,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극하가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극하는 새벽처럼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찾아왔다. 찾아온 속도처럼만 지나가 주었으면 참 좋을 텐데. 극하가 찾아올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열 지옥에서 제발 벗어나고 싶었다. 제발 기온이 20도, 아니 15도만 내려가기를. 뜨거운 열기를 마시며 폐와 함께 고통스럽지 않기를. 하지만 소망은 그저 소망일 뿐이었다. 나는 돈, 권력, 기술과 지식 그 무엇도 가진 것이 없다.

 

 TV를 틀었더니 뉴스가 흘러나왔다. 원래 케이블 영화채널에 고정해놔서 다른 채널이 나오는 일은 없었는데, 고치고 나서 설정이 초기화된 듯했다. 설정을 다시 바꾸려고 잘 먹히지도 않는 리모컨을 꾹꾹 눌러댔다.

 

 『다음 뉴스입니다. 앞으로는 극하의 심화가 진행되기 시작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각종 논문과 과학지에 따르면, 그동안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예측 자료로는 올해쯤에 심화가 진행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따른 여파로…….』

 

 내용에 대한 충격 때문에, 쓸모없는 긴 이야기들은 들리지도 않았다. 한 해가 온통 더위투성이고, 극하는 재앙과도 같은 시기인데 그것이 더 심화된다니……. 정말 지지리도 재수 없는 일이었다. 극하가 심화되기 전에 차라리 죽었으면 싶었다. 자살이란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차라리 어떤 사고─갑작스레 심장이 멈춘다든가 차에 치이던가─라도 났으면 했다. 하지만 미칠듯한 극하를 겪으면서도 나는 극복해낼 수도 없고 죽지도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만 갔다. 올해에도 아마 그럴 테지. 생각과 달리 반응하는 신체를 보며 자조했다.

 

 역시 그랬다. 극하는 시작되었고, 나는 하루하루 「생존」할 뿐이었다. 밖에 나가면 피부가 녹아내릴 듯하고,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땀이 끊임없이 맺혔다. 피부에 맺힌 땀방울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혐오감을 느꼈다. 흘러내리지도 않고 동글동글 맺힌 그것들은 극하에 고통받고도 살아남는 나를 닮은 것만 같았다. 기분이 나빠서 옷자락으로 계속 닦아냈지만 더위가 이어지는데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겨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랜만에 볼일을 보러 억지로 밖에 나섰더니 정말 죽기 직전이었다. 어지럼증에 아지랑이까지 합세해 시야가 제대로 맛이 가 버렸다. 비틀거리며 겨우겨우 걸음을 내딛던 나는 결국 무너져 버렸다. 길바닥에 닿은 손바닥과 무릎이 뜨거웠다. 눈물이 났다. 넘어져서 눈물이 난 것이 아니라, 여름이라는 것이, 극하라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눈물이 넘친 것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태양이 용광로처럼 나를 녹여버렸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있어도 고통만 가중될 뿐, 죽지는 않았다. 나는 익어버린 살을 보고 다시 일어나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물통을 보니 식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 생활용수는 아껴 쓰려면 아껴 쓸 수 있었지만, 식수는 생존에 관련된 것이라 불가능했다. 그렇게 죽고 싶어했으면서도 물을 마시지 않는 고통은 견딜 수가 없어서, 이렇게 식수를 마시며 억지로 살아가고 있다. 우습다. 참 가긍한 삶이다. 결국, 다시 식수를 구하러 나갈 수밖에 없었다.

 

 대로변의 풍경은 오늘도 여전하다. 자동차가 지나간 자리에 뜨거운 엔진의 열기가 남으면 모두 비명을 질렀다. 건물의 창문이나 옥상에서는 심심찮게 많은 사람을 볼 수 있다. 곧 뛰어내릴 예정이겠지. 그리고 차도에 뛰어들거나 뜬금없는 방법으로 죽는 등 여러 가지 죽음을 접하는 것이 일상이다. 몇 걸음 지나다 보면 사람이 으스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자주 들렸다. 그런 길가를 지나는데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더워도 견뎌요.』

 

 무슨 사이비 종교에서 나온 사람인지, 갑자기 사람을 붙잡고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더워서 빨리 가고 싶은데, 왜 붙잡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뿌리쳤지만 그는 다시 나를 잡았다.

 

 『더워도 죽으면 안 돼요!』

 『무슨 소리죠?』

 『곧 눈이라는 게 내릴 거에요. 그건 한 해가 모두 여름이 되기 전 존재하던 계절인 겨울에 내리는 것이었죠. 그건 차가우니까, 내리면 더위 때문에 힘들지 않을 거에요.』

 

 아하, 더위 때문에 미친 사람 중 하나였구나. 더워 죽겠는데 자꾸 붙잡고 헛소리나 하다니, 싫다. 그리고 말투도 기분 나쁘고, 왜 남의 일에 그렇게 신경을 써 대는지 모르겠다. 이 세상에서는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신경 쓸 이유도, 시간도 없다. 종교에 미쳐서 그런지 뭔지는 몰라도 굉장히 불쾌하다. 죽든지 말든지 네 인생이나 알아서 잘 살던지, 뭐 하는 짓이야.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아, 그러니까…….』

 

 불쾌지수가 치솟아,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밀쳤다. 내게 이런 데서 미친 소리 들으면서 더위에 고통받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사람이 가득 차서 불쾌한 냄새와 사람들 사이의 열기가 난무했다. 썩은 듯한 땀내, 불쾌한 체취, 서로의 피부밑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공감각적인 지옥이나 다름없다.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도망치듯 하차했다. 이미 옷은 땀에 쩔어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고 부채질을 하며 TV를 켰다. 오늘따라 송출되는 영화들이 그닥 재미가 없었다. 그냥 다시 전원을 꺼 버렸다. 옆에 있던 구식 라디오를 켜서 주파수를 맞췄다. 지직거리는 소리가 계속 나오더니, 주파수가 맞춰진 듯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음악 방송이 나오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음악이 끝나면서 속보 보도가 시작되었다.


 『속보입니다. 수자원 소유 연합 기구에서 앞으로 물 배급량을 제한하는 안이 통과되어, 물의 가격 상승이 예상됩니다. 현재 배급중인 양의 약 35%를 제한하기로 결정이 되어 생활용수와 식수량 조절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바닷물이 줄었대도 정제만 하면, 거기다 얼마 남지 않은 하천이나 강물까지 쓰면 모든 사람들이 수자원을 사용할 수 있었다. 탐욕에 찌들어 없는 척, 가격이나 야금야금 올리고는 자신들은 수자원을 낭비나 하다니! 정말 미친 자식들이다. 신경질적으로 라디오를 꺼 버렸다. 베란다로 나가니 더한 열기가 훅 밀려왔다. 짜증이 더 나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던 것 같다. 뭐라고 했는지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터져 버렸던 것이다. 한계치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신경쓰지도 않았던 밤의 기온이 언제나보다 더 덥게 느껴졌다.


 더하게 느껴진 더위에 묻혀 자고 일어나니 아침이 그닥 상쾌하지가 않았다. 물통을 교체하려고 했더니 부품이 고장이 났는지 제대로 빠지지가 않았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고는 집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와 건물을 나서는데 어제의 그 사이비가 다가왔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을 예정인가 보다.


 『안녕하세요. 같은 건물인가 보네요!』

『사이비 광신도랑은 말 섞고 싶지 않으니 비키시죠. 어차피 똑같은 말만 반복할 거면서.』


 따라오는 그를 무시하고 부품점으로 향했다. 그다지 멀지 않은 편이라 더위에도 별 신경쓰지 않고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런데도 뒤에서 그가 따라오니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별 시덥지도 않은 미친 소리를 지껄이려고 왜 이렇게까지 따라오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부품을 사고 가게를 나서니 가게 앞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가 보였다.


 『제 얘기를 조금만 더 들어 봐요…….』

 『단단히 미쳤네. 눈이고 뭐고 지금 더워서도 죽겠고, 물 값도 올라서 미치겠는데 어디서 헛소리야?』

 『봐요, 이미 더위 때문에 사람들이 이상해지고 있잖아요. 진정하고…….』

 『전도는 다른 곳에서나 해!』


 신경질이 나서 사이비 헌금으로나 쓰라고 지폐 몇 장을 그 얼굴에 내던지고 와 버렸다. 어차피 사이비 종교의 목적은 돈일테니, 이제 다시는 오지 않겠지.


 내가 두문불출해서인지, 요새 그 사이비는 볼 수 없었다. 이미 극하는 절정에 달해 있었고, 집에만 있는데도 의식이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고온의 증기가 서서히 나를 익히는 것만 같았다. 창문을 열었지만 냉방기가 있는 집들이 배출하는 열기가 우리 집 창문으로 타고 들어와 오히려 온도를 더 높이고 있었다. 젠장, 젠장! 욕이 절로 나왔다. 물도 이제 구하기 힘들어질 텐데 저렇게 태평하게 냉방기나 틀어놓고 있다니! 냉방기에도 물이 들어가서 함부로 켤 수도 없는데. 미친 듯이 날뛰고 욕을 내뱉다 보니 체온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땀은 더 축축하게 머리칼과 옷자락을 적시기 시작했다. 더욱 더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생각조차 흐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마침 본 물통은 비어 있었고, 월급통장과 지갑은 소액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정말 미쳐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최악이다. 나는 왜 죽지 못하고 살아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럴 거라면 다 죽어버리고, 나도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왜 망할 날씨는 여름만이 있어서, 그것도 극하라는 극열의 시기가 생겨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걸까. 나는 머리를 감싸쥐며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저 소리를 지르는 일과 생각없이 뛰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본능적인 고통과 미칠 듯한 감정에 그저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나와 세상을 저주했다. 이 더위로만 가득한 세상을, 탐욕적인 물의 주인들을, 그리고 죽지 못하는 나를.


 태양은 하늘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높은 온도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밑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이 일렁였다. 지면에서는 엄청난 열기가 전달됐다. 이미 피부는 익을 정도로 높은 온도에 노출된 상태였다. 이번에는 힘빠지는 웃음이 나왔다. 결국 최악의 상황에 도달했다. 물도 없고, 돈도 며칠 후에나 도착하는데, 그 동안 이 극하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 비틀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신호 앞에 멈춰선 내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섰다.


 『눈이 오길 기다려요.』


 그 사이비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기분이 아주 나쁜데 말을 걸다니. 일부러 내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들기 위해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신호가 바뀌었고, 사람들이 내뿜는 온도에 질색하며 집으로 터덜터덜 향하고 있는데 그는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자꾸 눈에 대한 말만 했다. 그러면서 여름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다고, 죽으면 안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런 말을 하는 이유 따위 들을 필요도 없었고, 이런 헛소리를 하는 인간따위 상종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말들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상종을 하지 않는 것도 어려웠다.


 『지난번에 종교에 가져갈 돈은 줬잖아.』

 『종교, 아니에요.』

 『그럼 뭔데! 왜 자꾸 나타나서 사람을 돌게 만들지?』


 점점 누적된 짜증이 목 바깥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현실 앞에서 환상에 맛이 간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앞에 있다면, 그 누구라도 나와 같을 수밖에 없다. 나는 현실의 문제에 눌려 있는데 말이다.


 『그저 사람들이 더위에 미쳐가는 게 무서워요.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에요.』

 『종교 맞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라며 구원을 기다리는 게 딱 종교야. 도대체 원하는 게 뭔지 말좀 해 봐.』

 『아직은 더위에 고통받아도, 죽음으로 고통을 벗어나려 하지 말아요. 눈이 내리면 다시 바뀔 거에요.』


 종교든 뭐든, 일단 이 인간이 제 정신이 아닌 건 맞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정말 환상에 빠져서 현실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상태겠지. 미칠 것 같은 세상에서 환상이나 좇으며 살다니, 쓰레기같다. 이 극열의 세상에서 다른 계절의 환상따위는 잊혀진 지도, 필요없어진 지도 오래였다. 나는 물도 없고, 수중의 돈도 없고, 극하는 점점 더 가속되고, 물 값은 더 오르고! 그런데 그런 환상 따위를 지껄이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환상 속의 세계로 가고 싶으면 죽으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닥치란 말이야!』

 

 나는 그를 밀쳤다. 달궈진 자동차에 데였는지 살이 타는 냄새가 흐릿하게 풍겼다. 나는 그에 그치지 않고 그의 목덜미를 잡아 보닛 위에 그의 머리를 내리꽂았다. 계속, 끊임없이. 피가 튀겼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분노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 더위도 사람을 미치게 한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두 가지가 결합했다. 나는 제대로 광분해 보닛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그를 보닛에 내리꽂았다. 눈 앞에 보이는, 내가 만든 광경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가 들었던 소식들만이 눈과 귀 위에 쌓여만 갔다. 물, 더위, 그리고 망할 눈.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 분노는 나의 정신을 갉아먹었고, 나는 지금 그 한계치에 도달했다. 숨을 헐떡이며, 나는 내리꽂았던 것을 내려놓았다. 눈 따위나 기다리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멍청해, 멍청하다고.

 

 태양은 그대로 타오르고, 더위는 끝없이 짙어져만 갔다. 이상하게 불안함의 징조가 내게서 떠나버린 것 같았다. 떨리지도, 두려움의 심장박동이 터져 나오는 일도 없었다. 떨림은 멎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다시 죽음을 목전에 두더라도 떨리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의문의 물음표가 찍히기도 전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왕이면 높은 건물이 좋겠지. 형체도 없이 바스러져서 흉측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홀에서 제일 구석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상과 건물들이 빠르게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 지옥에서 떠날 것이다. 멍청하게 그 지옥에서 계속 살든가 말든가.

 

 옥상문이 열렸을 때, 고온의 공기는 나를 훑으며 지나갔다. 그 공기 속에서 나는 난간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난간에 도착했을 때, 밑을 내려다보니 상당히 까마득했다. 어쩌면 떨어지기도 전에 죽을 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 편이 더 좋았다. 아니, 이제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았다. 난간에 손을 얹고 잠시 눈을 감았다. 달아오른 난간의 열이 손바닥에 전해져 뜨거웠다. 어느 하나 뜨겁지 않은 게 없는 이 열기의 지옥. 이제 곧 끝이다. 난간 바깥쪽으로 빠져나와 허공에 왼쪽 발을 먼저 내디뎠다. 건물들이 가득한 땅과 하늘의 흐릿한 지평선을 보았다. 그리고 마저 내 오른발이 허공으로 움직였다.


 나의 추락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내 피부에 차가운 것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렸다. 이 차가운 감촉. 하얗게 뭉쳐버린, 너무나 쉽게 녹아버리는 결정. 하얗고도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눈이다─ 눈이, 눈이 내린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소름과 추위라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
13.05.27


'상자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2  (0) 2013.08.09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1  (0) 2013.08.05
[검방4/스포] Responsibility 3  (0) 2013.07.07
[검방4/스포] Responsibility 2  (0) 2013.07.04
[검방4/스포] Responsibility 1  (0) 2013.07.04

병원에 도착한 뒤, 데스크에 잠깐 진료실 위치를 물었다가 진료실에 들어가 경과를 물었다.



"환자는 어떻습니까?"


"오늘 아침 진찰에서는 아직도 의식이 없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진료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 병실 문을 열자, 역시나 허강민은 의식불명인 채로 계속 침대 신세를 지고 있었다. 저런, 계속 의식불명이라 산소호흡기를 차면 돈이 더 들텐데. 하고 생각하며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태현 군의 병실에서 그랬듯이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미동도 없는 놈을 보자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 자식은 언제쯤 일어나는거야? 산소호흡기라도 차면 귀찮아지는데 말이지."



투덜대고 다시 책을 읽는데 책을 든 손 너머로 보이는, 덮여진 이불 위로 올라온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는 왼손으로는 매트리스를 짚고, 오른손으로는 이마를 짚고 상반신을 천천히 일으켰다.



"……드디어 일어나셨군 그래, 허강민."



허강민은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누구시죠?"


"뭐…… 뭐라고?"


"누구시냐고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말투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 자식은 이런 장난을 칠 작자가 아니다. 순간적으로 의심했던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모릅니다."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허강민은 사건때마다 보았던 그 분위기와 표정과는 너무 달라서, 내가 사람을 잘못 데려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분명해졌다. 나는 허강민을 뒤로 하고 진료실로 향했다.



"선생님, 그놈이 깨어나긴 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뭔가요?"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만……."


"지난번에 급하게 가셔서 말씀을 못 드렸는데요, CT촬영도 하고 이것저것 테스트해본 결과 환자분은 아마 역행성 기억상실증인 것 같습니다. 기억 장애가 일어나도 말을 하거나 밥을 짓거나 하는 등 일상 생활에 필요한 지식들은 잊지 않으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되구요."


"아…… 알겠습니다."



멍한 상태로 진료실을 나와 다시 허강민의 병실로 돌아갔다. 그는 여전히 침대에서 상반신만 일으킨 채 앉아 있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찾을 만한 게 없자 미간을 찌푸린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제가 왜……병실에 있는거죠?"


"왜 병실에 있다니? 그럼 그 전은 기억이 나나?"


"아뇨, 기억이 안 납니다."


"이런!"



그의 상태에 좌절하며 침대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보니 적의와 절망이 들어있지 않은 허강민의 이 말투가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벌써 2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첫번째 사건 때, 처음엔 정말 평범한 대학원생처럼 보일 정도로 평범한 말투였다. 허강민의 평범한 말투는 그 이후로 한 번도 듣지 못했다. 행복하게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갈 데도 없어 뵈는데, 퇴원하면 내 사무실에서 같이 지내며 일이나 돕게."


"누구신데 제게 이런 호의를……."



순수하게 궁금함을 얼굴에 모두 드러내니 정말 허강민이 아닌듯, 맞는듯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이 골칫덩어리가 되어버린 녀석한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도 혼란스러웠다. 원수? 악연? 아니지, 만약 그렇게 말하면 지금 바로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는데 그러면 곤란하지. 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하는 허강민의 눈매가 살짝 초승달 모양을 그리며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차라리 어둠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총구를 겨누는 게 더 익숙하고 편할 것 같을 정도로 너무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래도 이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 절망에 휩싸인 어두운 설계자의 모습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은 틀림없다.



병실을 나오며 의사가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아, 그리고 많은 경우 시간이 꽤 경과한 후에 기억이 점차 돌아오며 적절한 인출 단서를 제공시 기억 회복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사고 전의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는게 좋아요.'



만약 백선교 측에서 허강민의 생존을 알게 된다면, 그리고 허강민을 찾아 나선다면……. 만약 허강민이 그들에게 발각되어 그들이 허강민을 데리고 간다면 허강민은 기억을 더 수월하게 찾을 것이며 다시 설계자로 돌아와 태현 군과 승아 양을 '초대'할 수도 있다. 태현 군의 말에 의하면 허강민은 승아 양에게 쓸 분노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했지만 백선교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보기 위해 분노조차 남아있지 않은 사람을 다시 설계자로 만들고도 남을 것들이다. 백선교와 허강민의 접촉만은 막아야 한다.



입원할 때 허강민의 이름을 둘러댄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서태준이 있는 병원에 들렀다. 애너그램으로 변형한 자신의 이름을 부르다, 누나의 이름을 부르다, 내 이름을 부르다 정신이 돌아온다. 



"……은성아, 무열아……. 미안하다……."


"멍청하긴. 누워서 골골거리면서 사과하지 마, 이 인간아."



과거의 우리의 모습을 떠올린다. 억눌린 나, 그러면서도 웃는 누나, 화내기도 웃기도 하는 서태준. 그리고 태현 군과 승아 양, 허강민, 나의 모습을 떠올린다. 입에서 실소가 비집어 나온다. 병실 불을 끄고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을 때마다 허강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동적으로 생각이 나서 매우 혼란스러웠다. 지금 상태에서는 이전의 허강민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같아서 이전 사건들에서 대치하던 때처럼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친근하게 대하자니 괜시리 나 혼자만 어색했다. 이리저리 고민하다 결국 두 태도의 중점적인 태도를 유지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별 특별한 일 없이 돌봐야 할 두 사람을 왔다갔다 하다보니 금새 두 달이 지났다. 서태준은 오랫동안 정신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졌고, 허강민은 오늘이 퇴원일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늘은 자네 퇴원일이라네. 준비는 잘 했나?"


"네."


"그럼 가세."



그를 데리고 병실을 나와 병실 문을 닫을 때부터 차가 출발할 때까지 나와 그 사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그리고 차가 출발하고 약 10분쯤 지나자 그가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말을 꺼냈다.



"……사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었습니다."












맞춤법이고 표현법이고 진짜 못났다........ㅠㅠ

'상자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2  (0) 2013.08.09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1  (0) 2013.08.05
[검방4/스포] Responsibility 3  (0) 2013.07.07
VANITAS VANITIUM ET OMNIA VANITAS  (0) 2013.07.06
[검방4/스포] Responsibility 1  (0) 2013.07.04



그 '미궁'이 강성중에 의해 부서진 다음날─15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바로 수사를 위해 다른 경찰들 몇몇과 현장을 찾았다. 부서진 틈으로 바깥의 빛이 비치고, 긴장감을 줄 인물도, 긴장감도 없는 이곳은 그저 평온한 폐허일 뿐이었다. 지난 사건들에서도 그랬듯이 일단 시신을 먼저 수습하기로 했다. 지난 사건들보다 이유없이 착잡한 이유는 아마 지금까지의 설계자였던 '그 놈'이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서 내 과거의 일부를 보고 생긴 연민이 나를 착잡하게 한다.



지상과 제일 가까운 지하 1층 광장의 문 앞엔 아니나다를까, 피와 건물 잔해에서 나온 흙먼지로 더럽혀진 강성중의 시신이 있었다. 허강민이 칼로 찌른 상처, 그리고 건물 잔재로 인한 상처. 마지막까지 꼭 쥔 폭파장치 리모컨. 우리의 생명을 쥐고 흔든다고 말하던 입과 표정은 리모컨을 누르는 순간에서 시간이 정지한것처럼 비참하게 멈춰 있었다. 생명을 쥐고 있다는 권위자는 말 없는 비참한 시체 한 구로 전락했다.


셋 중 하나를 수습했으니 일단은 수습과 조사를 병행하라고 남은 인원에게 지시하고 순경 둘과 허강민의 시신을 찾기 위해 층마다 샅샅이 뒤지기로 했다. 



지하 1층에서 떨어졌으니 1층엔 없을 것이 당연하다. 통로를 지나 계단을 내려와 지하 2층에 도착했다. 건물이 7층이나 되는 큰 건물에 지하라 그런지, 폭탄을 치밀하게 설치한 것 같진 않았다. 완전히 붕괴된 게 아니라 건물의 모서리나 건물의 축부분은 완전히 산산조각으로 부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완전히 붕괴되지 않은 곳 덕분에 대충 방의 위치를 알 수 있어서 조금 작업이 수월했다. 붕괴되어 내려앉은 부분을 조심하면서 내려앉은 구멍들도 수색하던 도중, 구멍 안으로 지하 3층에 허강민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있었다. 아니, 허강민이었다. 여기서 죽은 인간 중에서 남은 남자는 허강민밖에 없으니까.



아랫쪽을 좀더 들여다 보니, 정확히는 지하 2층과 3층 사이에 걸쳐 있었는데 추락한 위치로 보아선 폭파하는 도중에도 건물이 회전하여 폭탄이 설치되지 않은 쪽으로 떨어져 걸쳐진 듯 싶었다. 저가 설계한 건물이 저를 살린 상황에 쓴 웃음이 샜다. 하지만 주변에 피도 묻어있고,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역시 떨어졌으니 죽었긴 죽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과 통로를 조금 헤매니 통로가 나와서 통로 옆의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하 3층에 와서 자세히 보니 떨어진 뒤 머리에 건물 조각을 맞았는지 옆의 큰 콘크리트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과 허강민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건물 철근에 오른쪽 팔다리가 깔려 있었다. 그 사이로 류태현 순경의 오른손이 피투성이가 된 채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데 뭔가 가벼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 놈의 안경이었다. 발을 떼고 가까이 다가가 맥박을 짚으니아직 살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 이대로 방치면 죽을 듯 싶었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그리고 류태현 순경이 허강민에게 뛰어가던 순간이 떠오르고, 오른손이 끊어지면서 허강민을 살리려 했던 그의 심정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를 저주한 허강민을 생각했다. 살아있는 것을 알고, 서로 만나면 위험하겠지. 알아서는 안 되겠지.



결단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단 순경들에게 몰래 들것을 가져오라고 한 후 허강민을 밖으로 몰래 옮기기 시작했다. 마침 아까 남은 인원에게 건물을 지시해서 그런지 올라오는 도중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차에 허강민을 태운 후 문을 닫고는 두 순경에게 말했다.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되네. 자칫하면 자네들도 퇴직당할 수 있으니 함구하게. 책임은 어떤 식으로든 내가 질 테니……."


"알겠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맙네. 승아양에 대한 일처럼 어쩔 수 없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영원히 묻어야 해……."



'백선교도 모르도록 말이지.'



이들은 전에 나와 승아 양의 함구증에 대한 일을 묻으려 한 믿을만한 사람들이라 뒷처리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차를 빠르게 몰다가 한적한 병원으로 향했다. 생존자들과 만나서는 안된다. 백선교가 발견해서는 안된다. 그 생각만으로 잘 모르는 길을 지나 우연히 적당한 규모의 한적한 병원을 찾았다. 차를 멈추고 마지막까지 허강민을 살리려고 손을 놓지 않았던 류태현 순경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낸 뒤, 병원 안으로 허강민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놈의 응급치료가 끝날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앉아만 있었다. 복잡했다. 처음 본 1초동안은 죽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 뒤에는 류태현 순경과 허강민이 만나는 경우를 생각했고, 백선교가 허강민을 다시 데려가는 것을 생각했고, 온갖 과장된 생각이란 생각은 다 떠올랐다.



그 생각의 정점을 찍으려는 순간,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환자분 보호자분 되시죠? 이쪽으로 오세요."


"아니, 보호자까지는 아닌데……."



간호사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먼저 진료실로 가 버렸다. 그래, 어차피 아무도 모르게 데려왔으니 보호자는 나밖에 없겠지. 불쌍한 자식.



의사의 진료실에 들어서 의자에 앉자, 의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더군요. 커다란 물건에 머리를 맞았는지, 아직 의식이 없어요. 그래도 응급치료는 다 해뒀고 골절된 부분들은 한두달 정도면 거의 다 붙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진료실을 나와, 아침을 맞이하여 점점 부산스러워지는 복도를 지나 옥상으로 올랐다. 주머니에 있던 담배갑을 꺼내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뿌연 담배연기가 뿌연 하늘로 오른다. 또다시 쓴 웃음이 나왔다. 담배를 지져 끄고 바닥에 던지고 왔다. 집 근처 산에서 시간이 지나 봉합이 불가능해진 류태현 순경의 오른손을 화장시켜 주고, 누나가 있는 납골당 아랫칸에 넣었다.



며칠 후, 상부에 허강민의 생존을 제외한 지금까지의 일을 상부에 보고한 후, 류태현 순경과 나는 나란히 퇴직당했다. 이제 더 이상 미련은 없다. 그리고 류태현 순경의 병실에 들어갔다. 며칠동안 언제쯤 깨어날까 계속 지켜보다 갔는데, 오늘은 드디어 깨어났다.



"깨어났나? ……미안하지만, 자네 오른손은 찾지 못했네."



사실 손은 찾았지만, 봉합할 수 있는 시간도 훨씬 넘겼고 잔해와 먼지에 오염되어 제대로 붙을 가능성은 낮아 보여서 화장해 버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미안하군.



"아……. 그랬군요. 허강민과 다른 사람들은……?"


"허강민은… 찾아냈다네.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


"승아양도 치료중일세. 본인 의지로 자네와는 다른 병실을 사용하고 있어. 지은양과 안승범은 상태가 나쁘지 않았지. 안승범은 치료 후 바로 구치소로 돌아갔다네. …감사해 두게. 그 놈이 자네를 거의 업다시피해서 전원이 탈출할 수 있었으니까. 힘 하나는 정말 장사인 놈이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지만 침묵이 흘렀다. 또 다른 건을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말하려고 한 거, 지금 말하는게 낫겠지.



"전에 이야기했었던걸로 기억하네만, 은퇴하기로 했다네. 상부에 모든 이야기를 했네. 처벌은 면했지만, 은퇴 건을 먼저 꺼내더군. 어차피 할 생각이었는데… 잘 된 일이지. 돌봐야 할 인간도 있고, 내 따로 생각한 일도 있어서 말이야."


"……."



말을 마치고 낮은 한숨을 쉬며 일어서 뒤돌아 가며 말했다.



"할 말이 많겠지. 하지만 일단은 머리를 정리하는게 좋겠어. 자네가 깨어났으니 난 가 보겠네."


"네, 무열 선배. 감사합니다."


"은퇴하는데 선배는 무슨……. 이제 형이라고 불러!"



피식 웃고는 병실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그는 모른다. 이걸로 다 된 거야. 이제 그들의 악연은 여기서 더 얽힐 이유도, 얽힐 상황도 없겠지.



얼마 뒤 우리의 퇴직일에 다시 류태현 순경을 만났다.



"잘 있었나?"


"네, 잠시 고향에 내려가 있으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와 안부를 주고받고, 류태현 순경은 승아 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면회를 가도 만나주지 않는다고 했다. 본인은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아마 그들은 헤어지지 않을 것 같다. 사고에서도 서로를 도왔고, 이번 사건에서도 서로를 도왔고, 모든 일이 서로를 위한 행동이었으니까. 잠시 개인적인 바람을 상상하다가 손에 관한 안부를 물었다.



"그래, 손은 좀 어떤가?"


"의수를 달았습니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도 곧 나아지겠죠. 다만, 오른손에 통증이 남았습니다. 환상통이라고 하더군요."



장갑을 낀 의수를 보여주며 조용히 미소짓는 그를 보니 괜히 미안함으로 가슴이 쿡쿡 쑤셨다.



"치료는?"


"하지만… 다른 문제가 생겨서 그만두었습니다. 환상통이 사라지면, 폐소공포증이 다시 소생했습니다. ……저는 이 통증을 가지고 가려고 합니다."


"치료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네, 평생… 가지고 갈 겁니다."


"참 재미없는 생각이야. 계속 치료받으면 둘 다 없앨 수 있을텐데."


"걱정해 주시는건 고맙지만, 이미 결정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류태현 순경에 대한 미안함이 더 쑤셔왔고, 그러면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지 않은 그를 보며 다행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그리고 의식불명인 허강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자네가 오른손을 희생한 보람은 있더군. 아직 살아 있으니 그 생각을 잊지 말고 계속 살아가게…….



"……선배는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침묵을 깬 류태현 순경…… 아니, 태현 군이 말했다.



"사무실을 하나 얻었는데, 나중에 정 할 게 없으면 찾아오게. 장애인 고용안정 제도를 준수하는 곳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태현 군. 이만 각자의 길을 가세."



뒤돌아 차로 돌아가며 잠시 태현 군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그가 앞으로는 즐거운 인생을 살기를 바라면서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걸어 허강민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검방4 클리어하고 얼마 안되서 쓰기 시작했던걸로 기억함.

칭구랑 검덕검덕 정확히는 허강민의 결말을 부정하면서 ㅇㅇ

추억도 되살리는 겸 2011년 상태 그대로 손은 대지 않았음.

'상자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2  (0) 2013.08.09
마도신공도 스토리를 달라 1  (0) 2013.08.05
[검방4/스포] Responsibility 3  (0) 2013.07.07
VANITAS VANITIUM ET OMNIA VANITAS  (0) 2013.07.06
[검방4/스포] Responsibility 2  (0) 2013.07.04
/